미국과 북한이 지난달 초 뉴욕에서 단 둘이 만나 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비밀 예비회담을 수 차례 가졌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한반도 주변정세가 크게 변했구나’하는 생각에 걱정이 몰려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때만해도 미국 외교관들에겐 북한 외교관이 참석하는 파티에서 건배마저 금지됐을 만큼 북한과 접촉은 금기 중 금기였다.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2005년 9ㆍ19 공동성명을 이끌었던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차관보가 회고록에서 북한과 양자회동 금지지침 때문에 6자회담을 시작도 못할 뻔한 뒷얘기를 자세히 적었을 정도로 이 지침은 엄격했다. 그랬던 미국이 비밀리에 북한과 접촉했다는 것은 외교원칙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슬람 급진세력과 대결로 동시에 두 곳에서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는 미국 국력의 한계가 근본 원인일 것이다. 북한 정권을 악마로 여기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득세하던 부시 정부에서 9ㆍ19 성명이 성사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하물며 ‘소프트 파워’ 외교를 중시하겠다고 천명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정부의 카드는 누가 봐도 분명하다.
2011년 말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집권 후 2차례 핵실험과 3차례 장거리 로켓 발사 등 핵개발 움직임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북핵 동향을 감시하는 사이트 ‘38노스’ 운영자 조엘 위트 존스홉킨스대 연구원은 지난달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국무부 재직시절 경험으로 근거로 북한 관리들은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국익이 무엇인지 똑똑히 인식하고 국제정세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미국이 자신들의 핵시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또 다른 판단근거도 가지고 있다. 어떤 북한 관료는 위트에게 “우리가 핵무기를 가지면 그걸 구실삼아 한국, 일본을 계속 미국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것 아니냐”는 추론을 펼쳤다. 물론 위트는 틀린 생각이라고 답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핵무기 보유를 체제수호의 최후 보루로 생각하는 북한 사람들에게 그 추론이 잘못됐다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무척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이번 4차 핵실험과 로켓발사를 계기로 남한에 사드 배치 검토가 공식화하자 중국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은 ‘우리의 핵개발 덕분에 미국은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중국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됐구나’고 더 확신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북한 핵개발이 점점 더 되돌리기 힘든 길로 가고 있는데, 최대 피해자인 우리 당국의 대응이 대북 제재에만 집중하는 건 너무 근시안적이다. 우선 폐쇄적 북한경제로 봤을 때 그 효과는 이란 제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또 유엔 제재가 발효되더라도 참여에 소극적인 중국과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북한이 숨쉴 구멍을 찾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제재는 한 번 결정되면 폐지하거나 수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장차 우리 정부 대북정책에 족쇄가 될 수밖에 없다. 힐 전차관보는 회고록에서 외교에서 제재는 폭격보다 좋지 않다고 단언한다. 협상이나 폭격은 원한다면 즉시 중단할 수 있어 상대방을 움직이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심지어 협상과 폭격을 동시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재는 한번 부과하면 원할 때 철회할 수 없어, 협상 진전을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만 적합한 무기라는 것이다.
지금 제재를 추진하는 미국 정부도 실제 발효보다는 이를 지렛대 삼아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계산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앤토니 블링큰 미 국무부 부장관이 사드 배치를 중국과 협상용 카드로 이용할 뜻을 내비친 것도 이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개성공단 폐쇄에 미뤄볼 때 우리 당국은 사드나 북한봉쇄도 협상 카드보다는 북한 정권을 공격할 무기로만 접근하는 듯하다. 우리 정부가 한반도를 핵 없는 곳으로 유지하려는 목표보다는 북한 정권 변화에만 집중하다 보면, 미국과 공조도 흔들릴 뿐 아니라 폭격보다도 더 나쁜 카드를 선택하는 게 아니냐는 걱정을 떨치기 힘들다.
정영오 여론독자부장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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