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일(한국시간) 오후 찾은 베트남 하노이의 유적지 문묘(文廟)에서는 어린 소녀들이 전통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이들은 다리 라인이 부각돼 섹시한 느낌을 주는 검정색 타이즈와 배꼽티를 방불케 하는 짧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옷차림이 국내 걸그룹 멤버들과 똑 닮았다.
베트남에선 이런 옷차림의 여성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다음날 오전 택시를 타고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윈터투어 ‘한국투자증권 챔피언십 with SBS’가 열리는 스카이 레이크 리조트 앤 골프클럽으로 향하는 길에 현지인 기사에게 짧은 영어로 K팝의 인기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기사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베트남 현지 일간지를 비롯해 인터넷 신문에서는 K팝과 관련한 소개 기사들이 자주 등장한다. 문득 베트남에 ‘골프 한류’ 현상이 나타날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의문은 취재를 하면서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어갔다.
강춘자 KLPGA 수석부회장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골프 관련 콘텐츠를 통해 아시아 지역 시장 확대를 모색 중이다”며 골프 한류를 강조했다. KLPGA는 지난해 3월 정기총회에서 글로벌 넘버원 투어 도약을 내건 이후 광폭행보를 보이고 있다. 협회는 올해 총 33개 대회 가운데 신설대회인 중국 월드레이디스 챔피언십과 베트남 더 달랏 대회를 포함해 5개 대회를 해외에서 열기로 했다. 글로벌 투어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해외 공동주관 대회를 확대했다.
해외에서 골프장을 운영 중인 한국인들도 골프 한류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장수 스카이 레이크 리조트 앤 골프클럽 전무는 “현지인들로부터 ‘한국인들이 하는 건 뭔가 다르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가 여기서 잘못하면 한국을 욕 먹이는 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골프장 외부에 커다란 태극기를 걸어놨다. ‘국가대표’라는 마인드를 갖고 시스템 개발, 시설 투자 등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인들은 KLPGA 선수들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 이곳 골프 저변이 아직은 열악하지만, 기존의 예능 문화 한류에서 더 가지치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여자골프라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골프 한류라며 마냥 뜬구름만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골프 한류를 위해 상당히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골프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KLPGA 선수들이 스포츠 외교사절단의 역할을 할 날이 머지 않아 보인다. 가수 싸이가 히트곡 ‘강남 스타일’로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의 공식 초청을 받았듯 KLPGA 선수들도 붐을 일으켜 타국 유력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든다. 그렇게 되면 양국간의 우호는 훨씬 더 돈독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한류는 김치와 K팝, 예능프로그램 등으로 대표돼 왔다. 한류도 더욱 다양성을 꾀해야 할 때다.
이미 기량 면에서 한국 여자골프는 세계 최고다. 세계랭킹 15위 이내에 한국 선수는 박인비(2위), 김세영(5위), 유소연(6위), 김효주(8위), 장하나(9위), 전인지(10위), 양희영(12위) 등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7명이나 된다. 미국과 유럽간 여자골프 대항전인 솔하임컵이 이제는 한국과 세계연합의 대결구도로 재편돼야 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최고의 기량에 확실한 시장성, 남다른 스토리텔링이 더해진다면 골프 한류도 현실화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22일 오후 한 선수는 현지 클럽하우스 옆 연습 라운딩 장소에서 홀로 남아 퍼트 연습을 계속했다. 한국투자증권 챔피언십 with SBS 최종라운드가 사실상 끝난 시간이었다. 그는 공이 홀에 들어가지 않을 때마다 아쉬운 듯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가끔은 한참 동안 먼 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정규투어 대회가 아니었지만, 경기가 끝난 후에도 맹연습을 하는 한국 여자선수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KLPGA 선수들이 ‘골프 한류’의 주역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확신이 든 순간이었다.
하노이(베트남)=박종민기자 mi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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