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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규수의 현대문화평설] 수저계급론과 홍익인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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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규수의 현대문화평설] 수저계급론과 홍익인간 정신

입력
2016.02.23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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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성분 탓하며 ‘2030세대’의 자기변명과 신세타령 확산… 부모세대 조롱하지 말고 흙수저 던져버리려는 도전정신 필요”

봉건적 계급사회의 유산을 ‘수저계급론’으로 부활시키려 하는가?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라는 현대판 반상의 서열이 사회 일각에 등장하면서, 서로 돕고 서로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 정신이 새삼 그리워지게 된 정초다.

‘2030세대’가 말하는 능력 있는 부모의 자식은 ‘금수저’란다. 이를 계량하면 자산 20억원 이상, 연수입 2억원 이상의 가정환경이다.

최하층 신분은 ‘흙수저’다. 자산 5000만원 이하, 연 수입 2000만원 이하의 소득구조다.

이렇듯 우리의 젊은이들이 설날 차례상에서도 부모의 ‘가치’를 돈으로 구분하여 귀천을 서열화하는 세태가 됐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자신의 신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조상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흙수저’는 설날이 와도 고향을 찾기가 버겁다.

문제는 패배주의의 확대다. 수저계급론이 ‘2030세대’의 자기변명 또는 신세타령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현재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해야 하는 ‘삼포’세대, 인간관계와 내집마련까지 포기해야 하는 ‘오포’세대, 더 나아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N포’세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결국 ‘출신성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모를 잘못 만난 탓으로 돌리려는 책임회피나 다름없다. 그렇듯 부모들의 경제적 능력, 사회적 배경, 가정환경 등이 자신의 신분을 결정한다고 보는 세태가 무섭기까지 하다. 부모가 쥐어준 수저색깔에 빗대어 현재의 처지를 비꼬거나 자학하고 있는 것이다.

양반의 자식은 양반이고, 상놈의 자식은 상놈이라는 세습적 신분구조를 왜 오늘에 되살리려 하는 것일까.

물론 ‘수저계급론’과 같은 현실비판적인 신조어가 등장하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재벌구조를 탓하고, ‘갑질’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 같은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 여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국가나 사회도 모든 구성원들의 불만을 수용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사라졌다”는 말을 들먹이며 부모 탓만 하고 있어야 할 것인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부모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자식의 사명이자 도리다. 자신은 비록 ‘바담 풍’해도 자식만큼은 ‘바람 풍’했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다. 부모로부터 대물림됐다는 ‘흙수저’를 던져버리려는 도전정신의 실종이 아쉽기만 한 것이다.

수저계급론은 영어의 관용적 표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복을 타고 태어나다, 부자집에 태어나다, 많은 유리한 점을 가지고 태어나다”라는 뜻의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에 나오는 은수저(silver spoon)가 어원이라는 설이다.

서양의 귀족들이 은수저를 사용했다는데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귀족 신분이 대물림되다보니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현대적으로 보면, 몇 백만원 혹은 몇 천만원 짜리 명품을 사용하는 백화점 VVIP가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계층의 비율은 0.01%에 불과하다.

따라서 필자는 수저계급론을 들먹이는 일부 2030세대들에게 더 이상 부모를 조롱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자본주의 냉혹함이 너희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동정심을 표하거나, 방황하는 청춘을 이해하고 있다는 식의 아부성 발언 또한 전혀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청년이여 대망을!”과 같은 진부한 슬로건을 들고 어설픈 타협에 나서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니 ‘자본주의 냉혹함’을 알았다면 오히려 냉철해져야 한다.

또한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혹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회대혁명’으로 국가사회의 새 판을 짤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를 악물고 “나는 우리 자식에게 흙수저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금수저’적인 사고다.

엄연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좋든 싫든 오늘의 위치에서 미래로 향한 노를 젓은 것은 자신의 몫이다. 거친 풍랑으로 물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다시 일어나야 하는 것이 보통의 인생이다. 누가 일으켜주지 않는다.

그런 것을 다짐하기 위해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부모에게 세배를 드리는 날이 설날이었다. 함께 존재하는 것, 그래서 부모에게 소중한 자식이 되고, 남에게 유익한 이웃이 되는 것이 홍익인간 정신의 기본이었다.

한국사를 관통하면서 봉건적 계급사회를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홍익인간 정신’의 부활이 시급하다.

▶ 필자 : 노 규 수

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 해피런㈜ 대표이사.

2013년 포춘코리아 선정 ‘2013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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