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나올 시집 교정지를 받았다. 절반 이상이 지난 한두 달 동안 순식간에 써 내린 것들이다. 나 자신이 버거울 정도로 열에 달떠 있었고, 무슨 터널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 탓인지 편집자의 손을 거쳐 되돌아온 그걸 보는 심사가 묘하다. 내가 쓴 것 맞나 싶다. 좋고 나쁘고, 만족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도무지 교정 볼 엄두가 안 난다. 지금 나와는 무관하다는 듯 모종의 완고함과 격조함으로 가득 찬 문장들. 쓸 당시의 열기와 혼몽 상태가 가라앉는다는 반증인 걸까. 어디 먼 데를 혼자 떠났다가 돌아와선 그때 찍은 사진을 뒤늦게 보면서도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 상태와도 비슷한 것 같다. 시를 쓰는 게 궁극적으로 자기 안의 또 다른 타인을 불러내는 일이긴 하지만, 이토록 새삼스럽도록 이질감을 느끼는 건 실로 오랜만.
돌이켜보니 올해로 첫 시집을 낸 지 20년이 된다. 그걸 의식하거나 기념할 마음 따윈 애초에 없었다. 그저 겨울 동안 이상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남모르게 새겨둬야 할 마음의 분방한 방황과 감당 못할 애정이 거셌을 뿐이다. 어쩌면 그 시간 동안 들끓던 마음의 잔해들에서 짐짓 거리감이 생기며 스스로 애처로워지는 건지도 모른다. 데뷔 25년이 다 된 시점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어 민망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첫 시집을 다시 내는 기분. 노망인가 회귀인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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