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광복 이후 올림픽 첫 메달을 안긴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이 20일 향년 9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 고문은 우리나라가 태극기를 들고 처음 참가한 1948년 런던 올림픽 남자역도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올림픽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주인공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며 체육인으로의 첫 발을 내디뎠다. 한국에 역도를 보급한 서상천 선생의 ‘현대 체력증진법’을 읽고 역도를 동경했고, 서 선생이 운영하던 중앙체육연구소에 발을 들였다. 역도 입문 2년 만인 1935년 제6회 전조선 역기대회 중체급에서 정상에 오르며 이름을 알린 김 고문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조선 예선에 나서 합계 317.5㎏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조선 대표로 전일본 역기선수권대회에 나선 김 고문은 다시 317.5㎏을 들어 올려 챔피언에 올랐지만 일본역기연맹은 “김성집이 만 18세가 되지 않았다”며 올림픽 출전을 불허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 치하를 벗어나면서 휘문중학교에서 역도부 후배를 가르치던 김 고문도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 대표팀 선발전에서 미들급 합계 385㎏으로 우승을 차지해 올림픽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김 고문은 본선 무대 미들급에 나서 합계 380㎏을 기록했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가 따낸 올림픽 첫 메달이었다. 1950년 6월 25일에는 한국전쟁 발발이라는 대형 악재 속에서도 김 고문은 1952년 감독 겸 선수로 헬싱키 올림픽에 나섰고, 75㎏급 경기에 나서 합계 382.5㎏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올림픽 사상 첫 연속 대회 메달리스트였다.
그는 39세까지 선수 생활을 하며 자기 관리의 모범을 보였고 은퇴 후에는 체육 행정가로 변신해 한국 체육 발전을 이끌었다. 1960년 대한체육회 이사가 된 이후 태릉선수촌장, 대한체육회 사무총장과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후배 체육인들의 경기력 향상에 힘을 쏟았다.
1968년 3월 제22대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에 취임한 김 고문은 1976년 2월까지 8년간 사무총장으로 대한체육회 행정을 돌봤으며 같은 해 11월 제9대 태릉선수촌장에 취임했다. 이후 1985년 4월까지 8년5개월간 태릉선수촌을 지키며 우리나라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데 힘을 보탰다. 또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에는 국가대표 훈련단장과 선수단 부단장을 맡아 한국 체육의 르네상스에 앞장섰고 1989년 3월에는 다시 태릉선수촌으로 돌아왔다. 1989년 3월 제11대 태릉선수촌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김 고문은 1990년 4월부터 연달아 제12대 선수촌장까지 역임하며 1994년 5월까지 총 13년 7개월을 태릉선수촌장으로 지냈다. 현재 제22대 촌장인 최종삼 촌장까지 통틀어서 김성집 고문보다 더 오래 태릉선수촌을 지킨 촌장은 없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한국선수단장을 맡아 선수단을 이끌기도 했다.
김 고문은 대한체육회가 한국 스포츠 발전을 이끈 스포츠 영웅을 국가적 자산으로 예우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011년 제정한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첫 해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고(故) 손기정 선생과 함께 이름을 올린 한국 근ㆍ현대 스포츠의 선구자였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이며 장지는 경기 안성 천주교 추모공원이다. 발인은 23일 오전 8시다. 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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