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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권력 추종 사회.. ‘덕의 절벽’ 내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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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권력 추종 사회.. ‘덕의 절벽’ 내몰리다

입력
2016.02.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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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 만연

정직하지만 가난한 부모보다

부도덕해도 부유한 부모 원해

비뚤어진 가치관이 정상처럼

기성세대 자기성찰 필요

2016-02-19(한국일보)
2016-02-19(한국일보)

전통적인 의미에서 어른은 학(學)과 덕(德)을 겸비한 존재다. 배움의 결과로 덕을 행하든, 덕을 쌓는 과정에서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든, 학과 덕은 동시에 요구되는 어른의 덕목이었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마감하며 ‘천상천하 자본독존’의 배금주의 사회로 급격하게 변모하면서 어른의 양대 덕목 중 덕의 축이 급속도로 붕괴했다.

한국일보가 문화예술계 인사 7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어른 없는 시대’의 가장 큰 원인으로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성사회’를 꼽은 응답자가 59%로 가장 많았던 이유다. 비슷한 범주인 ‘물질만능주의, 출세주의 등으로 인한 어른의 정의 변화’를 꼽은 응답자도 34%나 됐다.

“자식이 부모를 찾는 횟수와 부모의 경제력이 비례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을 만큼 우리 사회는 물질이 가치에 우선하는 곳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른을 기대하긴 어렵다.” “정직하고 올바르지만 가난한 부모와 비정직하고 부도덕하지만 부자인 부모 중에 누가 더 존경을 받는지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것이 모든 것인 것 추앙 받는 시대 분위기가 좋은 어른이 되기 힘들게 만든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제지상주의와 나만 편하면 된다는 개인주의 탓”, “권력 또는 부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세상에서는 도덕성과 정의와 헌신을 요구하는 어른이 생겨나기 어렵다”, “잘못된 기초교육과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의해 전 사회에 만연한 윤리적 아노미” 등 ‘돈의 맛’에 포획된 사회를 원인으로 꼽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응답자 A씨는 “불행하고 가난한 현대사를 헤쳐오면서 결핍감에 시달리는 기성세대는 자본의 논리, 물질만능주의에 휘둘리며 정신적 가치들을 내다버렸고 자녀에게도 이런 가치관을 강요해왔다”며 “황폐하고 텅 빈 내면인 채로 노인이 되어 아이처럼 징징거리거나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거나 걸핏하면 화를 내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응답자 B씨도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급격한 가치 변화, 지식사회와 문화예술까지도 상업적 가치가 우선 순위가 되어버린 세태 속에서 자존감을 유지하고 인본주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지적 활동과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끊임없는 반성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답했다. 응답자 C씨는 “불안이 증폭되는 세상에서 자신의 안전과 노후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면서 다음 세대의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나누는 부분이 줄어들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대와 호흡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문화 지체도 어른을 어른답지 못하게 하는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특히 자기성찰과 연관 짓는 응답이 많아 ‘꼰대 담론’이 성행했던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응답자 D씨는 “기성 및 노년 세대의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며 “이를 통해 천민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성숙시켜야 한다. 품위 있는 삶, 배려와 존중의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답했다. “어른의 최소 가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 “자기성찰 능력의 부족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폐쇄적 사회”, “어른 세대가 젊은 세대의 미래를 착복했다는 자기 반성이 선행되어야” 등의 응답이 많았다. 시대와 세대 교체를 거부하는 보신주의를 원인으로 꼽으며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다음 세대 인재 등용의 길을 열어야”, “젊은 세대의 가치와 어우러진 판을 짜는 일이 당대 어른의 몫” 등의 의견을 낸 답변자도 많았다.

언론이 문제라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왜곡과 혐오와 배제를 일삼는 언론의 행태 때문”, “몇몇 물적 기반을 지닌 이들을 제외하고는 노년의 발언이 담론의 공간으로부터 강제로 퇴거 당하는 현실”, “평범한 어르신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쌓아온 삶의 지혜를 펼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등의 의견이 있었다. 사후를 두려워할 필요 없게 장점만 두루뭉술하게 기술하는 평전과 부고기사를 원인으로 꼽은 이도 있었다. “인생에 대한 추상적 가치 판단의 체계를 가꾸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삶의 위세 그 자체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른을 망가뜨리고 소모해버리려는 정치권의 시도”, “외로움에서 비롯된 노탐”, “누구나 발언하지만, 누구도 듣지 않는, ‘소통 없는 불통’의 시대를 초래한 SNS” 등도 언급됐다.

큰 어른의 시대는 갔으나, 작은 어른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은 ‘어른 공백’의 시대. “교육, 언론, 문화, 종교 등의 지성사회가 자본과 성장 중심의 문화를 극복”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사회를 형성하는 핵심이라는 데 많은 응답자들이 공감했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개인과 공동체의 공동 노력, 다름에 대한 인정, 경험의 존중, 미래지향적 사고”가 가능한 사회를 위해 지행일치의 모범을 보여줄 어른을 갈망하는 것이다. 응답자 E씨는 어른들의 비타협적·사회적 발언을 촉구하며 “어른이 보여야 어른을 찾게 된다”고 꼬집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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