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보다 고액권을 먼저 발행한 미국과 유럽에서 고액권 폐지 논의가 불붙고 있다. 범죄와 부패를 조장한다는 이유지만 마이너스 금리 등 돈 풀기 통화정책의 효과를 고액권이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일단 풀리면 좀처럼 회수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5만원권으로도 불똥이 튀는 모습이다.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16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 블로그에 올린 ‘100달러 지폐를 없애야 할 때’란 글을 통해 “100달러(약 12만원)와 같은 고액권 지폐가 사라지면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액권으로 불법 현금거래가 더욱 수월해진 반면, 기술발전으로 과거처럼 고액 화폐의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이유에서다.
유럽연합(EU)은 이미 고액권 폐지를 유력하게 검토 중이다. 지난 15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유럽의회 공개연설에서 “500유로(약 68만원)가 범죄 목적으로 쓰인다는 국제적 비난 여론이 커지고 있다”며 폐지 검토를 시사했다. 앞서 12일 유로존 재무장관들은 테러리스트단체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 ECB에 500유로권 폐지 검토를 요청했다.
사실 고액권 폐지 주장은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고액 화폐를 폐지한 나라도 적지않다. 캐나다는 1953년부터 발행한 최고액권인 1,000달러 지폐를 2000년에, 싱가포르는 1만 싱가포르달러(당시 약 816만원)를 2014년에 발행 중지했다. 돈 세탁과 범죄 유용 등을 고려한 조치다. 현재 단일화폐로 최고액권은 1,000스위스프랑(약 124만원)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고액권 폐지론이 재등장한 시점을 들며 중앙은행의 마이너스 금리 도입과 관련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ECB는 경기부양을 위해 2014년 6월 예금금리를 마이너스(-)로 내렸고, 지난해 12월에는 금리를 ?0.2%에서 ?0.3%로 더 낮췄다. 돈을 은행에 맡기지 말고 투자와 소비에 나서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은행 수익성 악화로 파산을 우려한 예금자들이 보관이 편한 고액권으로 현금을 되찾아 보관하면서 원하는 효과를 보지 못하자 ‘범죄와의 전쟁’을 명분 삼아 고액권 폐지에 나섰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번 논의의 배경을 “500유로는 거래보다는 저장 목적으로 사용돼 경기부양이란 ECB의 통화정책과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역시 “마이너스 금리 통화정책이 현금 보유자들 때문에 무력화될 수 있어서”라고 분석했다.
국내 최고액권인 5만원권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5만원권 환수율은 2014년 25.8%, 2015년 40.1%에 그친다. 지난해 발행된 5만원권 10장 중 6장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같은 기간 1만원권 환수율이 100%를 넘는 것과 비교된다. 폐지 논의가 불붙은 다른 나라 고액권의 환수율(2014년 기준 미국 100달러 75.3%ㆍ500유로 88.7%)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박성준 한국은행 발권국장은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늘어난 5만권원 수요가 충족되면 환수율도 다시 오를 것”이라며 “현재 폐지 논의 중인 500유로만 해도 화폐가치가 5만원권의 10배 이상이기 때문에 단순히 비교하긴 어렵다”고 일축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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