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청 섞여서 일하지 않아도
파견 근로 폭넓게 인정 전향적 판결
자동차 이어 철강업계 첫 사례
포스코 노동자 2심에도 영향 줄 듯
현대제철(옛 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에서 불법파견을 인정받았다. 철강업계 첫번째 사례다. 특히 원청의 정규직과 동일한 업무를 하지 않더라도 원청 지휘를 받은 하청업체의 비정규직을 파견근로로 간주하는 전향적인 판단을 내린 점이 주목된다. 파견근로자 보호법에 따르면 2년 이상 파견근로를 할 경우 회사는 파견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인정하거나 정규직으로 고용할 의무를 갖는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제2민사부(부장 김형연)는 19일 현대제철 순천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161명이 원청인 현대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에서 전원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사내하청업체들이 ▦원청으로부터 지휘ㆍ명령을 받았는지 여부 ▦업무에서 전문성ㆍ기술성이 있는지 ▦독립적인 조직이나 설비를 갖추고 있는지 등 5가지 판단 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원고들은 각 협력업체에 고용된 후 피고의 사업장에서 피고로부터 지휘ㆍ감독을 받는 근로자 파견관계에 있었다고 봐야 타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구 파견법의 적용을 받는, 근무기간 2년을 초과한 109명은 현대제철 정규직으로 간주했으며 현행 파견법의 적용을 받는 52명에 대해서는 회사에게 정규직 전환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에서는 비정규직(하청) 노동자들이 정규직(원청) 노동자들과 같은 업무를 하지 않아도 파견근로로 인정한 점이 주목된다. 원청과 동일한 일을 해 온 기계ㆍ전기정비나 물류운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물론, 원청에는 없는 크레인 운전에 대해서도 파견을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크레인 운전자가 원청으로부터 무전 등으로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지휘 명령을 받은 것으로 판단했다. 하청의 비정규직이 ‘원청의 지휘명령’을 받았는지 여부를 중시한 것이다.
원고 측 소송대리인인 김기덕 변호사는 “원청이 담당하지 않았더라도, 전체 시스템 속에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공장 안에서 직간접적으로 이뤄지는 일은 모두 원청 업무로 볼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2011년 11월 현대제철 순천공장에서 크레인 운전과 정비, 물류 운반, 포장 등 업무를 담당하는 9개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2011년부터 원청과 동일한 업무를 해 왔다며 회사에 정규직 전환을 요구해 왔다. 장식현 금속노조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 사무처장은 “그간 현대제철은 하청근로자들에게 작업물량 및 작업 위치 등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벌점을 부과하며 근태 관리를 해왔지만 임금은 정규직의 60% 수준으로 지급하며 차별했다”고 말했다.
2010년 대법원으로부터 현대차 사내하청업체 해고자 최병승씨가 불법파견을 인정받은 뒤 최근까지 한국GM, 쌍용차동차 등 자동차업계에서는 불법파견 인정 사례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철강업계의 경우 2011년 포스코 광양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15명이 원청을 상대로 불법파견 소송을 제기했지만 2년 뒤 1심에서 패소했다.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이번 현대제철 판결이 포스코 노동자들에 대한 고등법원의 판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한다”며 “당장 유사한 성격의 사업장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소송을 준비할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 공시 결과에 따르면 제조업 전체 사내하청 노동자(소속 외 노동자) 수는 39만3,000명으로, 제조업 전체 근로자의 25%를 차지했다. 사내하청이 가장 활발한 곳은 조선업(67.8%ㆍ13만6,000명)이었으며, 철강금속업(37.9% 3만8,000명)과 자동차업(17.1%ㆍ4만4,000명)이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장재진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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