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지음ㆍ김현우 옮김
반비 발행ㆍ384쪽ㆍ1만7,000원
투쟁가를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불의한 사회를 뒤집고 새로운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대치까지 올렸던 음량이 한 톤 낮아지고, 무기를 내려 놓은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보일 때 우리는 그를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뜰 것이다.
리베카 솔닛이 투쟁가는 아니지만 최근 국내 출간된 ‘맨스플레인’의 파장은 웬만한 투쟁 이상이었다. 그는 2010년 한 칼럼에서 여성을 가르치려 드는 남성들을 꼬집으며 맨스플레인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이 단어는 뉴욕타임스 ‘올해의 단어’에 선정된 데 이어 2015년 옥스퍼드 영어사전 온라인판에 등재됐다. 솔닛은 2010년 ‘유튼리더’가 선정한 ‘세계를 바꾼 25인의 사상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신간 ‘멀고도 가까운’은 솔닛의 내밀한 회고록이다. 2013년 전미도서상 후보에 올랐고, 같은 해 전미비평가협회상 최종후보에도 선정됐다. 부모와의 갈등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 기록에서, 독자는 맨스플레인의 예리하고 재치 있는 주창자가 아닌 고통 받는 딸, 부모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며 자아를 조성해가는 한 여성을 만난다.
“어떤 어머니에게, 내 어머니에게, 딸은 나눗셈이지만, 아들은 곱셈이다. 딸은 어머니를 줄어들게 하고, 쪼개고, 무언가를 떼어가지만, 아들은 뭔가 덧붙여 주고 늘려주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잘생겼다는 생각에 금방 기분이 좋아지곤 했지만, 내가 봐줄 만한 여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머니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수많은 방식 중 솔닛이 택한 것은 이야기다. 그는 갈등의 무대 위에 직접 올라 어머니를 고발하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서 관객석에 앉는 쪽을 택한다. 무대 위에선 ‘백설공주’ ‘프랑켄슈타인’ ‘백조왕자’ ‘눈의 여왕’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등 동화와 영화, 소설에 등장한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솔닛은 그 이야기들에 어머니와 자신의 삶을 투영한다.
“백설공주에 대한 왕비의 시기심은 치명적이다. 그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는 욕망에 기반을 둔 것이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왕비는 누구의 칭송을 필요로 하는가? 본인의 아름다움 때문에 고난을 겪어야 하는 백설공주는 무엇을 놓고 왕비와 경쟁하는가? 여성들이 펼치는 이 드라마 이면에는 남성들이 있다. 왕비는 남성에게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것이며, 가치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은 그런 남성의 관심이다.”
이야기라는 통로를 거치고 나면, 어머니는 추억 속 폭군에서 동정할 여지가 있는 여자로 변한다. 솔닛은 이야기를 끌어다 자신의 삶을 사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눈을 들어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위력적인 이야기가 우리 삶을 해치지 않도록, 부디 이해와 용서로 우리를 인도하도록.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랑하라고, 미워하라고, 두 눈으로 보라고 혹은 눈을 감으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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