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채소'라고도 불리는 바닷말, 그러니까 해초는 봄 되기 전 빈약한 식탁 차림에 든든한 지원군이다. 식탁 위에서 국으로, 무침으로, 샐러드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해초가 제철을 맞았다. 찬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초는 지금이 가장 맛날 때다.
올해 기장 바다엔 악재가 겹친 모양이다. 미역의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초겨울의 이상 기후로 미역 생장이 더뎌졌고 해수담수화사업이라는 사회적 이슈까지 더해져 어민들은 울상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늦가을에 매어둔 미역은 기어이 자라 수확기를 맞이했다. 물살이 강한 바다일수록 소출은 맛있다. 강한 해류를 견디며 자란 기장, 송정 등지의 미역은 육질이 얼마나 탄탄한지 '쫄쫄이 미역'이라고도 불릴 정도다. 그만큼 좋은 값을 받는다.
찬 바다의 ‘미각 대표선수’ 미역
사실 우리가 아는 미역은 다 같아 보이지만 두 갈래다. 남방계와 북방계 미역으로 나뉜다. 기장 쪽 미역은 북방계 미역으로 줄기 위주의 길쭉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통영 완도 고흥 등지에서 자라는 남방계 미역의, 줄기보다는 잎사귀가 넓게 자란 생김새와 구분된다. 맛이야 먹는 사람이 용도에 따라 가를 일이다. 줄기가 발달한 북방계 미역은 씹히는 맛에, 남방계 미역은 부드럽게 풀어진 맛에 먹는다. 그래서 북방계 미역은 말려서 먹고 남방계 미역은 생물로 먹거나 염장해 보관한다.
육지 미역이 대부분의 생산량을 양식에 기대고 있는 데 비해 제주도에선 미역 양식을 하지 않는다. 제주 미역은 죄다 자연산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제주도 우도, 차귀도 어귀에선 넓미역이라는 종류도 발견된다. 마치 서핑보드처럼 너부데데하게 생긴 미역인데 거대하게 자란다. 몇 해 전부터 울릉도 인근 바다에서도 자란다는 소식이 있는데 울릉도에선 아는 사람만 따다 먹는다.
또 하나 미역으로 불리는 곰피미역은 어떨까? 곰보미역, 곰보, 곤피, 쇠미역 등 다른 이름도 많은 이 미역에는 오해가 있다. 수산생명자원정보센터 홈페이지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곰피미역이라고 하는 이 미역의 정식 명칭은 쇠미역사촌으로 다시마목 다시마과에 해당한다. '개곤피'라 불리며 식용으로 거의 쓰지 않는 다시마목 미역과의 곰피와 곰피미역은 구멍이 있다는 공통점 외엔 사뭇 다른 바닷말인데 이름을 빌려주고 있는 셈이다.
정작 해야 할 미역 이야기는 미역귀다. 귀처럼 생겨서 미역귀라고 부른다는 말도 있지만, 온통 주름으로 이뤄진 통통한 모양새는 오히려 해삼에 가깝다. 실상은 미역이 씨앗을 퍼트리는 생식기에 해당하는 이 특수부위는 다시마 같이 단단해 버리다가 요즘에야 건강식품 대접을 받으며 귀한 몸이 됐다. 잘게 썰어 사용하면 씹는 맛이 꽤나 기분 좋다. 점액질이 많아 손질이 쉽지 않은데 물에 여러 번 빡빡 헹구면 점액질이 달아난다. 일본에서는 점액질을 그대로 살려 낫토처럼 끈적하게 먹는다. 4월쯤부터 시장에 생물이 나오지만 1년 내내 말린 것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바닷물이 데워지기 시작하면 대부분 지역에서 미역은 녹아 버린다. 지금이 딱 제철이라 시장 좌전마다 온갖 미역이 쏟아져 나온다. 물미역은 그대로 초고추장 양념이나 간장, 식초 양념에 무치면 그만이지만, 쌈용으로 먹을 때는 팔팔 끓는 물에 '튀겨' 먹는다. 갈색을 띤 미역은 뜨거운 물에 데치면 맑은 녹색으로 변하는데, 색만 변하도록 스치듯이 가볍게 데치는 것을 튀긴다고 말한다. 먹기 좋은 크기로 손질한 미역은 냉동해 두고 내킬 때마다 해동해 먹어도 된다. 요즘은 튀겨서 염장보관한 가공식품도 나와 사시사철 쉽게 구할 수 있어 수고를 덜었다.
미역이 지천인데 다시마는 어디에 갔냐고? 다시마는 5월이나 돼야 먹을 만하게 자란다. 철이 아닐 때는 말려둔 것을 육수용으로 자주 쓰는데, 육수를 빼고 난 다시마는 얇게 채쳐 국물 요리에 넣어도 좋은 건더기가 된다. 김은? 11월부터 수확해 이미 돌김, 파래김, 곱창김..., 햇김이 쫙 깔렸다. 김은 원래 말려 쓰고, 양식 김은 1년에 네 번도 수확해 굳이 제철 찾을 이유도 희미해졌다. 역시 지금 제철을 맞은 파래는 무침 반찬으로 겨울 식탁에 가장 빈번히 오르는 식재료다. 완성형의 모던 한식을 선보이는 오너셰프 강민구의 레스토랑 ‘밍글스’에서 그 맛을 ‘우마미 누들’ 파스타로 색다르게 경험해볼 수 있다. 오징어먹물과 파래, 장맛을 조화시켜 근사한 감칠맛의 바다 향으로 완결시켰다.
남해 제주 서해 바다의 낯선 해초들
미역 얘기만 하자면 다른 해초들이 서운하다. 남해 쪽 바다에선 매생이며 감태, 까사리파래, 세모가사리가 도착했다. 겨우내 신나게 매생이굴국, 매생이떡국, 매생이전을 먹었으니 끝물인 매생이 이야기는 생략하고, 매생이와 파래의 중간쯤으로 생긴 감태로 가보자.
감태는 김처럼 얇게 펴 말려 가공해 파는 것도 있는데 연둣빛 색만큼이나 생생한 바다 향이 상쾌하다. 서양 요리에서는 간 것을 흩어 뿌려 색을 내고 향을 더하는 용도로도 쓴다. 사실 감태는 미역과의 다른 바닷말 이름인데 전라도 쪽에서는 이 실 같은 파래를 감태라고 부른다.
뾰족뾰족한 세모가사리는 식감이 좀더 날렵해 샐러드나 비빔밥에 어울린다. 까사리파래는 파래와 세모가사리의 하이브리드라 설명하면 쉽다. 아닌 게 아니라 두 해초를 섞어 말렸다고 해서 까사리파래다. 까슬까슬하게 씹히는 식감과 김의 단맛이 어우러진다. 간장 양념에 김무침처럼 무쳐 먹는 조리법이 일반적이다.
제주 해초는 좀 남다른 면이 있다. 제주 향토음식으로 전국구 명성을 얻은 몸국에 들어가는 모자반의 제주 이름이 몸. 못난 이름과 딴판으로 바닷말 중 비주얼 '갑' 자리를 차지하는 갈래곰보도 있다. 붉은 색이 나는 우뭇가사리도 제주 명물인데 햇볕에 말려 하얗게 탈색된 발린 우뭇가사리는 백발 성성한 수염처럼 하얗다. 우리는 그 과정을 4~6월 제주도에 놀러 갔다가 렌터카 발치에 치이는 '수북한 옥수수 수염 같은 것'의 형상으로 목격하곤 한다. 철마다 제주도의 온 도로를 점거하는 그것의 정체가 우뭇가사리다. 소털 같이 생겨 조선시대엔 우모(牛毛)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한천, 우묵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는데, 이는 가공한 후의 이름. 다른 홍조류가 한천, 우묵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톳은 어느 바다에나 흔해서 이 철에 미역 못지 않게 많이 올라오는데, 부드러운 동시에 톡톡 터지는 식감에 먹는다. 초고추장에 샐러드처럼 가볍게 버무려 먹거나 간장 양념에 반찬을 만들어 둬도 요긴하다. 다른 해초들과 마찬가지로 만만하게 비빔밥 재료로 쓰기도 한다. 해초 비빔밥에는 멍게젓을 곁들이면 좀더 본격적인 맛이 나니 참고하자. 톳은 몇 가지 해산물과 함께 톳밥을 짓기도 한다.
해초 요리의 기분 좋은 변신
그렇다면 서해는? 남해와 오버랩 되는 해초도 나고 쇠미역도 나는데 차별화되는 것은 함초다. 짠 갯벌에서 자라는 염생식물로, 인천공항 넘어가는 영종대교에서 광활한 장관을 펼치는 그 붉은 해초가 함초다. 녹색이었다가 익으면서 붉은 색이 뒤덮는다. 인천뿐 아니라 서해안 갯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퉁퉁마디가 다른 이름인데, 함초라는 말 자체가 짠(鹹) 풀이란 의미다. 칠면초, 해홍나물 등 다른 붉은 염생식물도 퉁퉁마디와 비슷한 삶을 산다. 함초를 말린 것은 가루를 내 소금 대신 사용하면 짭짤함과 동시에 고급스러운 바다 향을 입힐 수 있다. 서양요리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재료다. 그쪽에서는 샘파이어(Samphire)라는 이름으로 비싼 대우를 받는다. ‘채집요리’의 원조로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1위를 받은 덴마크 레스토랑 노마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함초를 쓴 것이 있다. 한국에서는 요리 재료로 쓰기보다는 가루나 환 형태로 가공해 다이어트나 변비 해소를 돕는 보조제로 먹는다.
프렌치 비스트로펍 ‘메르삐꽁’의 오너셰프 정지연은 요즘 바닷말 요리에 열 올리는 중인데, 레시피 연구 결과 해초가 오일 파스타에도 유용하다고 말한다. 피조개나 꼬막 같이 향이 강한 조갯살을 발라 해초를 같이 넣으면 더 진한 바다 향이 난다. 펜네(속이 뚫린 원통형으로 생긴 파스타)나 오르키에테(귀 모양으로 오목하게 생긴 파스타)처럼 향과 맛을 듬뿍 머금을 수 있는 파스타를 이용하면 더 짙은 맛을 낼 수 있다. 해초는 전복 살과 내장을 통째로 이용한 리조토에도 제격이다. 해초를 먹고 자란 전복의 내장에서 나는 맛이 어차피 해초가 소화된 맛이다 보니 안 어울리기가 더 어렵다.
해초가 온 바다의 온도 그대로 차가운 채로 먹는다면 굴과 잘 어울린다. 봄을 앞두고 살이 더더욱 오르고 향도 깊어진 서해 쪽 굴에 갖가지 해초를 곁들이면 해초의 바다 향이 굴의 펄 향과 어우러지고, 꼬들꼬들한 해초의 식감은 터지는 순간 녹아버리는 굴로는 채울 수 없는 씹는 맛을 더해준다.
이해림 푸드라이터 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
*푸드라이터로 다양한 매체에 맛 이야기를 기고 하고 있는 이해림씨가 매주 금요일 한국일보 라이프면에 음식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피처 에디터로 ‘보그’ 등 패션 잡지에서 일한 그는 음식공부가 재미있어 음식 글을 즐겨 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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