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두둥두둥~”. 어두운 전자 음악이 시작되면 “휘이이잉”하는 휘파람 소리가 뒤따른다. 10여 년 전 꺼졌던 미국 드라마 ‘엑스 파일’의 오프닝 음악이 다시 울려 퍼졌다. 미국 폭스TV가 지난달 24일 ‘엑스 파일’ 시즌10을 시작했다. 2002년 시즌9가 막을 내린 뒤 무려 14년 만의 부활이다.
1993년 시작된 ‘엑스 파일’ 은 에미상(16개)과 골든글로브상(5개)에서 상을 휩쓸며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외계인을 비롯해 의문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수사하는 과정을 파격적으로 다뤄 ‘CSI’ 등에도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이 인기를 바탕으로 새로 시작된 ‘엑스 파일’은 방송 첫 날 미국에서만 1,619만 명의 시청자를 불러 모으는 저력을 과시했다. 시청률 조사회사인 닐슨에 따르면 이는 지난달 셋째 주 기준(1월18~24일)미국 최대 스포츠 행사인 프로미식축구리그(NFL) 결승전인 슈퍼볼 경기 중계를 제외하고 네 번째로 높은 시청자를 확보한 수치다.
국내에도 마니아층이 두텁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8년 동안 KBS에서 시즌1~9가 전파를 타면서 인기를 누려 하이텔, 나우누리 등 PC통신에서 연합 동호회(엑스필)가 만들어졌다. 인터넷 다운로드 등이 활성화되기 전인 1990년대에 그것도 무명에 가까웠던 배우(데이비드 듀코브니·질리언 앤더슨)가 주인공으로 나온 외국 드라마에 대한 팬덤이 형성된 건 당시에는 이례적인 풍경이었다. 이 드라마에 대한 팬덤 현상을 연구하는 국내 학술 논문(‘엑스파일’ 에 대한 팬덤 현상 연구·1998)까지 나왔을 정도다.
이 열풍을 이끈 주역이 성우 이규화(61)씨와 서혜정(53)씨다. 이씨는 멀더(데이비드 듀코브니)의 목소리를, 서씨는 스컬리(질리언 앤더슨)의 목소리를 연기해 낯선 외국드라마를 안방극장 시청자들에게 편안하게 들려줬다.
“스컬리, 나예요.” “멀더, 어디에요?” 배우의 얼굴보다 국내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게 바로 두 사람의 목소리다. 이를 고려해 ‘엑스 파일’ 시즌10을 국내에 유통하는 케이블채널 캐치온은 처음으로 성우 더빙판을 따로 서비스하기로 했다. 지난달 29일 ‘엑스 파일’ 시즌10 국내 방송을 계기로 이씨와 서씨를 최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엑스파일’이 다시 시작한다니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설레더라고요.”(이씨) “스컬리는 그대로더라고요.”(서씨)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두 성우의 목소리를 코 앞에서 들으니 마치 ‘엑스 파일’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엑스 파일’ 이 다시 시작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든 생각은.
이규화(이)=“미국에서 방송되기 6개월 전에 ‘엑스 파일’ 시즌10 제작 소식을 접했다. ‘엑스 파일’ 관련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따고 미국 드라마 관련 주제로 박사 학위를 딴 ‘엑스 파일’ 팬이 알려주더라. ‘엑스 파일’이 연이 돼 그 친구를 20년 넘게 알고 지낸다. 그 친구가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나 이제 마흔 다섯이 됐으니. 그렇게 ‘엑스 파일’ 새 시즌 소식을 접하고 든 생각이 KBS에서 이걸 다시 할까란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케이블 채널(캐치온)에서 방송한다며 목소리 더빙 연락을 받았고, (가슴이 벅차)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 ‘엑스 파일’ 은 진보적인 드라마다. 진취적이기도 하고. 1990년대 어떻게 이 드라마가 통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엑스 파일’ 시즌10은 음모론과 미스터리 사건의 배후를 외계가 아닌 정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전 시즌과 비교해 더 급진적이다).”
-14년 만에 멀더와 스컬리를 다시 보니 어떤 기분이 들던가.
이=“이 친구들이 얼마나 변했을까가 궁금했다. 녹음 3일 전에 영상을 받았는데 스컬리는 세련되게 나이를 먹었더라. 멀더는 더 멋있어졌고. 둘 다 변했는데 다시 보니 감격스러웠다.”
서혜정(서)=“처음 시사 땐 흑백 영상으로 봤는데, 그 땐 스컬리를 보고 ‘아 나이가 들었구나’란 생각을 했다. 뒤늦게 컬러 영상으로 다시 보니 예전 모습 그대로더라. 옛 생각이 났다. 처음엔 스컬리 역을 맡은 앤더슨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배우가 됐을까란 반응이 많았다. 키도 160cm 정도로 아담했으니까. 드라마를 보면 앤더슨은 대부분 롱코트를 입고 나온다.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해 그랬던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멀더는 덜 뺀질뺀질해진 것 같더라. 첫 회엔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나왔는데 중후한 분위기도 풍기고.”
-10년 가까이 극중 캐릭터의 목소리 연기를 해오면 자연스럽게 교감이 생길 것 같다.
이=“멀더는 순수함이 매력인 인물이다. 영약하고 세련된 사람들 틈에 그런 멀더가 더 끌리는 거고. 빈 구석이 많은 사람 같다고 할까. 그런 면에서 실제 나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주위에서 ‘왜 이렇게 현명하지 못하냐’ 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라서(웃음)…”
서=“스컬리는 내가 젊어서 추구한 여인상이었다. 내겐 없는 지적이면서 차분한 점에 끌렸다.”
-원작 속 멀더와 스컬리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들인 노력은.
이=“의상 등 스타일을 극중 인물과 비슷하게 한다. 때론 옷 등 외부적인 환경 변화가 의식을 지배하기도 하니까. 남성들이 군복을 입으면 달라지는 것처럼. ‘엑스 파일’에서 예를 들면 시즌10에서 멀더가 처음에는 수염을 텁수룩하게 하고 나온 뒤 2화부터는 말끔하게 자르고 나오는데, 나고 그렇게 했다.”
서=“‘엑스 파일’ 녹음을 했던 8년 여 동안 스컬리의 단발머리를 고집했다. 배우처럼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 건 아니지만 캐릭터에 좀 더 들어가기 위한 준비다.”
- 특히 어려운 점은 없었나.
이=“멀더의 대사가 굉장히 길다. 한 번 말을 하면 거의 두 문장 정도를 하니까. 그래서 숨이 딸린다. 한 두 번은 쉬어 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입이 안 맞고. 외국인과 한국인의 호흡에 차이가 난 다는 걸 이걸 하며 알았다. 아직도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두 사람이 오래 호흡을 맞춰 어려움이 덜 할 거 같은데?
(이 씨와 서 시는 1982년 KBS 성우 공채 17기 동기이기도 하다.)
서= “오빠(이씨)는 즉흥적이다. NG가 나 다시 녹음을 할 때면 한 번도 전과 같은 톤으로 말을 한 적이 없다. 처음엔 힘들었는데, 점점 몸에 배 조금씩 익숙해지더라. 날 강하게 키웠다고 할까. 이젠 어디다 던져 놔도 살아남을 것 같다(웃음).”
- ‘엑스 파일’ 로 달라진 변화가 있나?
이=“‘엑스 파일’ 후 항상 어두운 목소리 연기를 해왔다. 소리를 질러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멀더의 목소리 톤이 일정해 그게 각인된 것 같기도 하고. 술 먹고 택시 타기가 조심스럽다. 언젠가 여의도에서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 동석한 친구와 짓궂은 농담을 했는데 택시 기사가 멀더 아니냐고 묻더라. 너무 창피해 아니라고 딱 잡아 뗀 뒤 중간에 내린 적이 있다. 올림픽 대교와 동호대교 사이였던 거 같은데 어찌나 민망했던지. 택시 운전하는 분들은 보통 TV를 잘 안보지 않나. 그런 분이 목소리만 듣고 알아봤다는 생각에 놀라 슈퍼마켓 등에 갈 때 내 목소리를 온전하게 내는 걸 나도 모르게 피하는 것 같다(웃음).”
서=“애초 성우가 됐을 땐 명랑하고 높은 톤의 목소리 연기를 많이 했다. 특히 애니메이션에서. 그런데 ‘엑스 파일’을 하며 스컬리를 통해 중저음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내레이션 쪽으로도 더 길을 넓힐 수 있었다. ‘재밌는 TV 롤러코스터 1-남녀탐구생활’ 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도 ‘엑스 파일’ 덕분이다. (서 씨는 ‘남녀탐구생활’ 에서 감정을 뺀 건조한 목소리의 내레이션으로 인기를 누렸다.)
-성우는 어떻게 됐나.
이=“나도 성우가 될 줄 몰랐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이라 무대 배우를 꿈꿨다. 졸업 후 의지가 부족한 건지 1년을 넘게 배고프게 사니 현실을 못 이기겠더라. 극단에서 먹고 자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방송사 PD가 됐든 기자가 됐든 직장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성우 모집 공고를 봤고, 지원해 운 좋게 한 번에 됐다. 내가 성우로서 지닌 능력은 30%인데, 운이 좋아 여태껏 버티고 있는 것 같다.”
서=“어려서부터 어머니한테 혀 접어 내는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면 혼이 났다. 어머니가 나름 양반 집안 출신이라 말을 또박또박 천천히 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 중학생 때 국어시간에 책을 읽는데 선생님께서 ‘성우 한 번 해봐라’는 말씀을 하시더라. 물론 그땐 성우가 뭔지도 몰랐다. 그 뒤로 고등학생 때 취미로 방송반에서 활동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예대에서 하는 방송경연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개인상을 받아 서울예대 입학 혜택이 주어지면서 성우의 길을 밟게 됐다.”
-외화 더빙 시장이 어렵다.
이=“우리가 외화 더빙 전성시대를 누린 마지막 성우 세대다. 자연스러움이 대세인 시대라 성우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데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자연스러움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서툴고 실수를 했는데도 자연스럽다고 다 좋다고 볼 수는 없는 거잖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훈련을 통해 전달된 자연스러움이 필요할 때도 있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이 특히 그렇고. 그래서 훈련된 성우가 필요하다. 목소리로 신뢰를 전달하는 게 중요한 작업이다. 외화 더빙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자국어 보호법에 따라 지상파 방송에서 자국 언어 더빙을 의무화하고 있다더라. 우리도 국어 발전을 위해 한국어 더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젠 예전과 다르다. 외국 배우들의 실제 목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성우들의 더빙이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도 있다.
서=“우리 때만 해도 멋있고 예쁘게 목소리 내는 방법을 배웠고, 실제 그렇게 목소리 연기를 했다. 그땐 녹음 시스템이 아날로그 방식이라 말 하나 하나를 성우가 꾹꾹 눌러줘야 스피커를 통해 제대로 전달 되던 때였으니까. 그런데 이제 디지털로 녹음 시스템이 바뀌면서 성우의 화술도 변해가고 있다. 힘을 빼고 꾸밈 없이 가려 노력한다. 현재 화술의 화두는 자연스러움이다. 그래서 내가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게 심수봉이 노래하듯 말하라는 거다. 정확한 대신 기교 없이 일상에서 말하듯 전달하면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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