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직원의 가족, 지인들만 가입할 수 있는 펀드가 있으니 투자하면 수익 내게 해줄게.”
권모(37ㆍ여)씨는 서울 명문대를 졸업한 여의도 소재 H 증권사 과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엄모(32)씨를 2014년 12월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복잡한 금융 분야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는 엄씨를 실력 있는 증권인이라 생각했던 권씨는 “가족과 지인들만 투자할 수 있는 펀드에 가입하게 해주겠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넘어갔다. 자신의 투자로 남자친구의 업무 성과도 올리고 수익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1년 넘는 교제 기간 동안 총 117차례 걸쳐 1억7,200만원을 엄씨에게 건넸다.
권씨는 증권사 출입증을 보여주는가 하면 수억원이 찍힌 월급 통장 사진을 메신저로 보내주는 남자친구를 굳게 믿고 결혼도 결심했다. 권씨는 지난 2일 엄씨와 함께 부모님을 만나 결혼 허락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곧 새 살림을 꾸리게 됐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권씨는 남자친구를 부모님에게 소개한 지 채 열흘도 안 된 11일 충격을 받고 엄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엄씨가 다른 여성에게도 투자를 빌미로 돈을 뜯어 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엄씨를 처음 경찰에 고소한 사람은 그와 결혼을 약속했다는 또 다른 여자친구 노모(33)씨였다. 노씨는 4,000만원을 투자했는데도 수익금을 돌려주기는커녕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남자친구를 의심하게 됐다. 노씨는 인터넷 증권 상담을 통해 증권사 직원의 가족, 지인만을 위한 펀드 종목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또 H 증권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남자친구가 그 회사 직원이 아니라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지난 1일 경찰에 고소장을 접수한 상태였다.
경찰 조사 결과 엄씨는 권씨와 노씨 외에도 이모(37)씨와 동시에 교제하며 같은 수법으로 총 2억 1,740만원을 뜯어냈다. 피해 여성 3명에게 알려줬던 이름을 비롯해 학력과 직업 모두가 가짜였다. 피해자들에게 받아낸 돈은 카지노 경마 등 도박에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구로경찰서는 엄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고 18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확보된 증거물로 볼 때 추가 피해자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인터넷 상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경우 철저하게 신분을 확인하는 등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신지후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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