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승 정치부기자
“선거구 획정 전에는 안심번호를 줄 수 없다.”지난 15일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견지한 입장이었다. 그런 선관위가 갑자기 돌아섰다. “선거구 획정 전이라도 요청이 있으면 안심번호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여야는 16일 일제히 안심번호 제공을 선관위에 요청했다. 안심번호는 55일 앞으로 다가온 4월 총선에서 여야가 여론조사로 지역구 경선을 치를 때 꼭 필요하다. 하지만 선거구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치르는 경선은 불법이다. 선관위는 애초 이런 위법에 가담할 수 없다며 안심번호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정치권에 굴복해 안심번호를 제공키로, 법을 위반하기로 한 것이다. 선관위조차 법보다는 현실이 먼저인 셈이다. 공직선거법(57조8항)은 각 정당이 당내 경선 등에 이용할 목적으로 안심번호를 이용할 경우 경선 ‘23일 전’ 선관위에 신청하도록 정했다. 물론 선거구 획정을 전제로 한 규정이다.
선관위의 ‘눈감아 주기’는 처음이 아니다. 올 초 모든 선거구가 무효화 됐을 때는 예비후보자등록 업무를 중단했다가 재개했다. 기존 선거구를 기준으로 등록한 예비후보들이 1월 1일 ‘선거구 무효’로 자격을 박탈 당해 선거운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이들의 불법 선거운동을 용인해 주기로 한 것이다.
사실 선관위 탓이라고만 하긴 어렵다. 선관위 결정은 ‘선거구 증발’이란 초유의 사태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선거구 획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정치권을 압박할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그럼에도 선관위에 대한 예비후보들의 불만은 높다. 선거구 무효에도 지역구 의원들의 의정보고 활동을 용인한 게 대표적이다. 적지 않은 후보들이 낙선 시 선관위를 상대로 소송전을 예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선 낙선자들까지 불복에 나서면 그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다. 과연 선관위가 이번 선거를 제대로 관리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그래서 드는 것이다. 독립된 헌법기관인 선관위는 공정하고 엄정한 선거관리가 존재의 이유다.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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