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심은 데 콩 난다 말,
‘아버지를 닮아버린 나’
“승렬아 퍼뜩 내려온나! 너그 아부지 쓰러지셨다.”
1989년 가을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한의원 개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왕십리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건네준 전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 전화를 끊은 후 곧장 밤차를 타고 황급히 대구로 내려갔다.
“아버지 괜찮아예?”
집에 와보니 온 가족이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의 당당함과는 전혀 다른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대구백화점 앞을 지나다가 갑자기 쓰러지신 후 겨우 몸을 추스른 상태였다.
“승렬아, 네가 장남이자 외아들인데 앞으로 서울 일은 정리하고 대구에서 아버지 한약방일 돕는 게 어떻겠냐?”
그날 이후 서울로 돌아온 나는 한 달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결심했다.
“그래 서울에서의 한의원개원 포기하고 아버지일 도우러 지금 내려가자.”
그날로 더 넓은 세계에서 날개를 펼치고 싶었던 꿈을 접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16년의 절대 짧지 않은 세월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도 비껴간 깊은 산골
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창녕이다. 창녕에서도 첩첩 산골,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이런 산골에 설마 사람이 살겠냐?’라며 모르고 지나쳤다고 ‘모실’이라 이름 붙여진 동네였다. 나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유림의 학자이자 선비이셨는데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21일간 전국 규모의 큰 유림장(儒林葬)까지 열렸다. 당시 KBS, MBC-TV 9시 뉴스에도 보도되고 미국 뉴스위크지 특파원까지 산골동네로 찾아와 화제가 되었고 국립민속박물관에 그 장례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아버지는 11남매 중 다섯 번째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고향 집은 학문에만 정진하던 선비의 집안으로 몹시 가난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먹을 게 없어 밥투정하던 아버지를 마당으로 끌고 가 가죽 혁대로 내리치며 혼내셨다고 한다. 창녕향교의 전교를 지내고 안동 도산서원장 임명을 기다리던 중 작고하신 할아버지는 내 기억에 멋진 붓글씨로 전국에 이름난 명필에다 인자하기만 하셨다. 자식 교육에서는 엄하셨나 보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아버지는 고향 집을 벗어나 대처로 나가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게 되었다. 결국 초등학교만 마치고 별다른 연고도 없는 대구로 고단한 고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독학으로 야간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산장수에다 물지게 나르기 등 구두닦이 빼고는 안 해본 것이 없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학비를 버느라 몸살로 드러눕는 날도 많았지만 굴하지 않고 끝내 학교를 마치셨다. 남의 집 더부살이의 마음고생과 서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는 한의약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58년, 지금은 대구한의대 부속 한방병원이 된 ‘제한의원’에서 약제사 일을 시작했다. 1962년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한 후 현재의 다사 죽곡지구인 달성군 다사면 매곡리 왕실고개라는 곳에서 ‘신한약방’을 개업했다. 그곳이 바로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이유는 다르지만,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큰 산과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넘고 싶어도 넘을 수 없는, 그래서 오히려 자꾸만 벗어나고 싶은 그런 존재.
IMF, 10년간의 긴 겨울의 시작
“아부지 진짜 이래도 괜찮겠어예?”
IMF가 터졌던 1997년 12월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듬해 첫 달 마감집계를 내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매출이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순간 한방병원 개원을 목표로 아버지가 얼마 전에 매입한 5층 빌딩의 대출원금과 이자 금액 숫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바로 아버지와 나에게 닥쳐온 혹독한 겨울의 서막이었다.
나는 한의대 재학시절부터 대구에서 한의사 생활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졸업 후 미국으로 가 당시 신학문 분야인 카이로프랙틱을 배울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더 나은 배움을 위해 서울에서 이름난 한의사분들을 여러 곳 찾아다니며 문하생으로 배우기를 청하였다. 어찌 보면 일견 당돌한 신출내기 한의사의 열정에 좋은 말로 돌려보내는 분도 있었고, 무급이라도 괜찮겠냐며 한번 배워보라는 분들도 계셨다. 그때 겪었던 온갖 경험이 한의사 생활 30년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크나큰 자산이 되고 있다.
서울에 개원 준비 중 아버지 때문에 급히 대구로 내려왔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 한의원을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7년 넘게 대구시한의사회 정책 관련 일을 하다 보니 한의계를 둘러싼 안팎의 현실을 차츰 깨닫고 ‘앞으로는 기존의 평범한 한의원만으론 경쟁력을 유지하기 힘들겠다’는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 곁에서 한의원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미국, 일본, 독일로까지 학회와 세미나에 참석하며 더 나은 배움을 갈망하였다. 그런 고민을 거듭 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대구에서 함께 한방병원을 해보자 하셨고 나 또한 내 고민의 탈출구가 될 수 있겠다 생각하고 뜻을 같이했다. 그렇게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찰나 뜻밖에 IMF 사태가 터져버린 것이었다.
나쁜 일은 줄을 이어 온다 했던가. 설상가상으로 인근에 대형할인점이 들어와 건물에 있던 농협 하나로마트가 갑자기 문을 닫았다. 수억 원의 막대한 임대보증금을 급히 돌려줘야 했다. 아버지가 원래 갖고 있던 대출금 상환계획이 완전히 어긋나 버린 것이다. 나 역시 아버지가 빌딩 매입 시 내 이름을 빌려 대출을 받은 관계로 대출금을 갚지 않는 한 별도의 개원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겪은 10년 간의 고난이 시작됐다.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힘든 일도 많았지만, 결국 모두 이겨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다.
‘대구 약령시’를 부활시킨 내 아버지
그렇게 다사다난한 세월을 보내고, 2015년에 큰상을 받았다. 정부의 공적 조사를 거쳐 한의학발전에 이바지한 사실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서 공로표창을 받았을 때 주변의 많은 분이 축하해주셨다. 특히 과거 2006년 아버지께서 대구약령시 부활 공적으로 같은 상을 받은 사실을 알고 있는 몇몇 분들은 더욱 축하를 아끼지 않으셨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와 함께한 경험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부자간 2대에 걸쳐 보건복지부 장관 공로표창을 받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는 주변 분들의 축하인사까지 받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뒤늦게나마 공로를 인정받아 장관표창을 받고 대구한의대에서 명예한의학 박사학위까지 받으신 사실은 아들인 내게 참 흐뭇한 기억이다. 학생 시절부터 지켜본 아버지는 그야말로 내가 결코 넘을 수 없는 큰 산과 같았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온 식구를 깨워야 하는 부지런한 열정과 함께 유독 꽃과 나무를 좋아하신 아버지는 집 앞 화단도 열심히 가꾸어 예전에 대구시가 선정하는 ‘아름다운 정원’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당연히 자기 일에도 늘 열정이 넘치는 분이셨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대구로 한약방을 옮겨온 아버지는 30대 젊은 나이에 대구시 한약 협회장에 당선되자 대구약령시 부활에 매진하셨다. 대구약령시는 조선 효종 때 왕령으로 처음 출범하여 2백 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졌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던 국립약재시장이다. 당시만 해도 약령시 부활에는 주변 모든 분의 인식이 현저히 부족하였다고 한다. 그런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는 시장을 비롯해 대구시 여러 공무원과 관련 단체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무릎을 맞대고 설득한 결과 마침내 1976년 대구약령시가 열렸고 지금은 대구를 상징하는 가장 큰 규모의 전국적 문화축제가 되어있다.
내 인생의 또 한 분 스승인 아버지
“원장님 알고 보면 아버님 많이 닮았어예. 콩 심은 데 콩 난다 아입니꺼?”
아버지와 나를 동시에 잘 아는 한 분이 건넨 의미심장한 말이다. 사실 내게는 인생의 큰 스승으로 생각하는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미국 뉴욕의 통증의학전문의인 김문호 박사님이고 다른 한 분은 동국대 한의대학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정부기관인 한약진흥재단 원장직에 계신 신흥묵 교수님이다. 김 박사님은 동서양 의학을 통합한 ‘면역봉독요법’의 세계적 전문가로 미국 NBC-TV 뉴스에 온몸 관절이 굳어져 수년간 휠체어에 누워있던 다발성경화증 환자가 봉독 치료로 걷게 된 내용이 소개되어 큰 화제가 된 분이다. 또 과거 김대중 대통령의 다리를 낫게 하여 지팡이를 짚지 않고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치료하신 분이기도 하다. 신흥묵 교수님은 한의대 졸업 후 미국 보스턴 하버드의대로 건너가 공부하신 동서양 의학에 두루 정통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로 나의 한의학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맡아주신 분이다. 두 분 모두 학문적 업적으로 ‘마르퀴즈 후즈 후’ 세계인명사전에까지 등재되셨다.
그런데 지금에야 깨닫게 된 것인데 내 인생의 큰 스승이 또 한 분 더 계신다. 바로 나의 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헤쳐나가야 했던 IMF 이후 10년의 힘겨웠던 세월 동안 절치부심 나의 경쟁력을 키워 나갔던 과정이 오늘의 성공으로 나를 이끌었다. 백화점식 한방병원보다는 작지만 강한 경쟁력을 지닌 전문특화 한의원이 되어야 한다
는 것도 그 과정에서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밤낮으로 노력하여 마침내 지난 2006년 대출금의 많은 부분을 갚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도움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내 손으로 직접 은행대출에다 살던 집까지 팔아 한강 이남 최초로 지금의 척추관절 디스크 류머티스성 전문치료 네트워크 한의원을 개원했다.
아버지는 한의대를 졸업한 분이 아니지만 놀랍게도 동의보감 처방 정리편인 방약합편을 통째로 달달 외우는 분이다. 한편으로 아버지는 그 넘치는 열정만큼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권위로 초지일관하여 내 가족 모두를 너무 힘들게 한 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그런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아 무진 애를 썼다. 사실 한의대 지원동기도 아버지가 권해서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 담임이셨던 내가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이런 아버지가 오히려 내게 반면 교사역할까지 한 인생의 큰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내 머릿속에는 항상 아버지를 닮고 싶은 나와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은 내가 공존하면서 나에게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는 평생을 검소함으로 일관했지만 남을 위해서는 큰돈을 아끼지 않으신 분이다.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 집에서는 라면조차 아까워서 국수에 넣어 부려 먹으면서도 밖으로는 예비군 청사를 건립하여 기탁하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겉으로는 조카들이 찾아와도 절대 용돈 한 푼 쥐여주는 일이 없는 일견 냉정한 분이셨지만 뒤로는 아버지 집안 형제들이 어려움에 부닥치면 늘 큰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제 곧 팔순에 접어드는 나의 아버지, 앞으로는 부디 지난 세월 무거운 짐은 내려놓으시고 좀 더 즐길 줄 아는 여생을 보내며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해본다.
정리 김민규 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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