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묻는 것이라고 한다. 밥은 무엇인가? 밥을 먹고 똥을 낳는 사람은 무엇인가? 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무엇인가? 철학이 이렇게 묻는 것이면 어려울 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어렵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냥 물어서는 안 되고 집요하게 물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전통이 없다. 물으면 혼난다.
세상에는 우리와 다른 이들도 있다. 세상은 무엇이고 정의는 무엇인지 집요하게 묻던 사람들, 그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이다. 그들의 몸은 다른 나라에 복속되었지만, 정신은 철학이라는 씨앗으로 뿌려져 유럽에 여럿의 철학 나무를 키워냈다. 그 나무들이 현대세계를 이끌고 있다. 동양에도 그리스 같은 나라가 있었다. 중국인 역시 끊임없이 물었다. 그러나 그리스처럼 자기를 죽여 씨앗이 되기보다 스스로 큰 나무가 되었다. 유럽이 훨씬 역동적이고 다양한 사상을 길러낸 까닭이다. 그래서 유럽에는 철학의 숲이 생겼지만, 동양에는 중국철학만이 고목으로 남았다. 그리하여 독일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연장일 수 있지만, 한국철학은 중국철학의 연장일 수 없다. 우리가 중국철학을 쉽게 가져다 버리고 유럽철학을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다. 묻지 않는 우리에게 철학은 공부다. 그래서 철학을 하라면, 열심히 공부한다.
물음이 모두에게 의미 있는 철학이 되려면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열린 토론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스와 중국에는 그런 역사가 있었다. 탈레스에서 시작한 논쟁의 역사가 그리스철학을 낳았고, 춘추전국이라는 논쟁의 역사 속에서 중국철학이 자라났다. 그 위에 정치가 뿌리내렸다.
철학의 나라 중국이 근대에 한 줌도 안 되는 나라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그들의 철학에서 타자가 사라져서다. 고목으로 남는 것보다 여러 나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임을 중국은 알지 못했다. 토론 문화가 패권 문화로 변질되면서, 더 이상 철학을 키울 토양은 사라지고 정치가 흔들린 것이다. 타자의 제거가 당장은 편하지만 실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때로 싸우고 불편해도, 공존이 최선이다. 우리는 왕왕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을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철학적이다. 그들과의 논쟁을 통해 플라톤이 나왔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명확히 내보이고 토론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보이려 독배까지 마셨다.
한 번도 고대 그리스나 중국의 뜨거운 전통을 누려본 적 없는 우리는 집요하게 묻지도 않고 토론도 안 한다. 대신 모든 것을 힘으로만 한다. 남과 북이 얼마나 똑같은지! 철학 없는 민족의 슬픈 자화상이다.
철학 없는 정치의 비극을 실감하는 시대다. 민주주의를 내세워 독재를 해도 자연스럽다. 나라사랑을 말해서, 나라가 무어냐고 따져 물으면 역정을 내는 이가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는 나라. 헌법보다 대통령과의 의리가 먼저라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하는지 모르는 의원의 나라. 상대방을 연신 종북으로 몰아대면서도, 자신들의 정체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한 번도 자기가 누구인지 묻지 못한 이들. 나는 누구지? 스스로 물었으면 좋겠다.
여당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슬픔은 가중된다. 정체불명이 된 야당. 상대방 얼굴에 오물을 투척하고, 그 오물이 상대방이라 주장하면서도 자기가 누구인지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묻고 논쟁하여 그 답을 국민에게 제시하는 대신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라고 기자회견을 한다. 그러더니 한쪽은 당을 깨고 나간다. 학습능력이 뛰어나 당 정도야 우습게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 묻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정치는 영원히 엉터리 번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 후보와 불끈 쥔 주먹이 비슷해 자랑스럽다니.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더 이상 슬프게 하지 말기를.
정치인들! 스스로에게 좀 묻자. 그리고 말 좀 해주시라.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상현 한옥연구소 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