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남녀가 좋은 감정을 갖고 오래 사귀다 보면 자연스레 성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래야만 하냐고? 생물학적 본성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녀 간에도 성적인 요소를 초월해 높은 수준의 정신적 교류를 내용으로 한 애정이 가능하다는 오랜 믿음도 엄연하다. 바람직한 사랑은 지혜를 사랑하듯 마음과 영혼을 고무시키고 정신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언급(<대화>)에서 비롯된 ‘플라토닉 러브’에 대한 관념이 그것이다.
▦ 역사적 인물 가운데 육체관계 없이 혼외 여인과 오랫동안 묘한 연애를 지속한 것으로 유명한 이가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 오스트리아제국 황제다. 조카인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피살로 세계 제1차 대전을 일으킨 당사자가 됐지만, 실제론 점잖고 검소한 성품으로 68년 간의 제위 기간 동안 제국의 황혼기를 중후하게 물들인 현군(賢君)으로 꼽힌다. 50대 중반에 자신보다 스무 살 어린 당대의 여배우 카타리나 슈라트를 사귀어 죽을 때까지 30년 간 애정 어린 관계를 이어갔다.
▦ 생기발랄한 슈라트 부인은 황후가 죽자 정부(情夫)가 되고 싶다고 황제에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황제는 “우리 관계가 유지되려면 앞으로도 과거와 같아야 한다”며 “나에게 큰 기쁨인 이 관계가 부디 계속되기를 바란다”고 편지에 적었다. 이후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며 침대로 옮겨갈 법한 연애의 모든 장면을 공공연히 연출했으나, 결코 동침은 안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슈라트 부인을 미워했던 황녀조차 부친의 임종 순간에 흰 장미 두 송이를 들고 찾아온 슈라트 부인에게 순결한 애정에 감사하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 최근 영국 BBC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생전에 안나 티미에니에츠카(2014년 사망)라는 미국 기혼녀와 ‘각별한 우정’을 나눴다는 얘기를 전했다. 교황의 저서 <행동하는 사람>(1969년 발간)의 영역자로 만나 수십 년간 교류했다고 한다. 편지에서 교황은 “나는 당신에게 속해 있다”는 티미에니에츠카의 고백에, “당신이 가까이 있을 때나 멀리 있을 때나 어떤 경우라도 내가 당신을 받아들이고 느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응답하기도 했다. 연애감정에도 불구하고, 순결한 정신적 교류의 흔적이 느껴지는, 묘하게 우아한 대목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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