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희 여의도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필자가 막 전문의가 되어 환자 진료를 시작했을 무렵의 일이다. 극심한 피로로 집안일을 전혀 할 수 없다는 한 30대 여성 환자를 진료하고 결과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모든 검사가 정상이라고 말하자, 갑자기 환자가 “내가 이렇게 기운이 없고 힘든데 이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며 울부짖어 매우 놀라고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경우 의사로서 해 줄 수 있는 말이 “신경성이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 좋은 음식 먹으며 푹 쉬라”는 극히 상식적인 말 밖에 없었다. 의사로서 자괴감까지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이후 다행스럽게도 임상 영양이나 스트레스, 피로 등에 대해 심도 있는 최신 의학지식을 습득하고 영양 평가나 자율신경기능을 측정하는 심박동 변이 검사 등을 시행하게 되면서 예전의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나타나지 않는 피로 환자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검사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피로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빈혈, 갑상선 질환, 당뇨, 여러 가지 호르몬 분비 이상을 일으키는 내분비 질환, 감염성 질환뿐만 아니라, 신부전, 심장 및 폐질환, 류마티스성 질환, 암질환 등과 같은 심각한 질병도 피로의 원인이 될 수 있는데, 피로 환자의 약 40~50% 정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경우 검진이나 외래 진료에서 비교적 쉽게 원인을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나 피로 환자의 반 이상에서 혈액이나 영상의학 검사로 이상 여부를 밝혀내기 힘든 우울, 불안, 스트레스 등 정신적 원인과 에너지 대사 저하, 자율신경 기능 저하, 영양불균형 등이 원인으로 작용하며, 끝까지 원인을 밝혀내기 힘든 ‘원인불명’도 존재한다.
심박동 변이검사를 통해 피로 환자의 자율신경을 평가해 보면 특히 교감 신경 기능이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자율신경에는 교감과 부교감 신경이 있는데, 이 중 스트레스에 적절히 대응하고 극복하도록 작동하는 게 교감신경이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혈압이 올라가며 얼굴이 붉어지고 식은땀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만성화되면 교감신경의 기능이 떨어지게 된다. 이 때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스트레스를 감소시켜 주면 대부분 회복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교감신경뿐만 아니라 부교감 신경 기능까지 떨어지는 단계로 악화되고 이때부터는 쉬어도 쉽게 회복이 안 되는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게 된다. 보통 이 단계에 다다르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병원을 찾게 된다.
영양학적으로는 가공식품을 통한 과당 및 트랜스 지방산의 과다 섭취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같은 대영양소와 미량 영양소인 비타민, 미네랄 사이의 불균형이 피로환자에게 흔한데 이런 경우 영양소를 혈액에서 세포 내로 이동시킨 후 화학적 에너지로 바꾸어 주는 세포막과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떨어져 피로를 가속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이 지금 쉽게 회복이 안 되는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면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감당할 만한 것인지, 집에 돌아와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회복이 되고 있는지, 섭취하는 음식의 영양 균형은 잘 맞고 있는지 살피고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해 보고 그래도 피로가 좋아지지 않으면 전문적인 의사의 진료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질환이 동반되지 않는 만성 피로는 건강에 치명적인 위협은 아니지만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만듦으로써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행복한 삶에 대한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만성 피로는 어쩌면 이제까지 타인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자신을 아끼고 돌보지 않은 채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에게 몸과 마음이 보내는 경고장일 수도 있다. 어제도 오늘도 피로에 찌들어 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먼저 자신의 생활을 성찰하고 몸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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