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쁘게, 즐겁게 바둑은 두기는 처음입니다.”
한국 바둑의 자존심을 걸고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치훈(60) 9단이 ‘2016 전자랜드 프라이스킹배 한국바둑의 전설’에서 밝힌 소감이다. 새해 벽두에 펼쳐진 바둑 전설들의 반상 향연에 대국자들도, 팬들도 모두가 함께 즐거워했다. 조훈현(63) 9단, 서봉수(63) 9단, 조치훈 9단, 유창혁(50) 9단, 이창호(41) 9단 등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거장들에게서는 전성기 시절 못지않은 뜨거운 열정과 승부 혼을 느낄 수 있는 대회였다.
한국 바둑의 거장 5명은 지난달 23일부터 14일까지 풀리그로 승부를 겨룬 이 대회에서 유창혁 9단이 우승을 차지하며 상금 5,000만원의 주인공이 됐다. 준우승은 이창호 9단, 3위는 서봉수 9단, 4위는 조치훈 9단이 차지했고 조훈현 9단은 최하위에 머물렀다.
15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조치훈 9단은 조훈현 9단에게 211수만에 흑 불계승을 거둔 것을 떠올리면서 “존경하는 조훈현 선배한테 제가 많이 졌는데 이번에는 고마웠다”고 즐거워했다. 이어 “서봉수 선배한테도 바둑을 지면 안 되는데 (졌다)”며 또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래도 진짜 재미있게 뒀다”고 웃었다. 조치훈 9단은 서봉수 9단과 대국 중 우세한 상황에서 스스로 대마를 죽이는 큰 실수를 저질러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는 등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한국어와 일본어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치훈 9단은 유창혁 9단과의 대결에서도 초읽기가 끝나기 전에 돌을 놓지 못해 어이없게 시간패하기도 했다. 조치훈 9단은 1승3패로 5명 중 4위에 그쳤지만 시상식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최하위인 5위에 그친 조훈현 9단은 “개인적으로 조금 불만스러운 성적이었다”며 “조치훈 9단에게 너무 이겨서 미안한 마음에 양보하다 보니 첫 판에 졌다. 그때부터 조금 어긋난 것 같다”고 밝게 말했다. 그는 최근 정치 입문 제의를 받고 고민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 듯 “요새 바둑을 공부해야 할 텐데 다른 데 정신이 팔렸다”며 “만약 내년에 이 대회에 나오면 조치훈 9단처럼 공부를 해볼까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중국과 일본의 전설을 초대하면 국제적으로 재미있는 대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고 기대했다.
초대 우승에 등극한 유창혁 9단은 “선배들에게 여러 가지로 배운 것이 많다”며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지도자 일을 주로 했는데, 이번 경기로 승부사가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공격적인 스타일로 ‘반상의 일지매’로 불리던 그는 “이번 경기를 하면서 승부 감각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느꼈다”며 “그에 반해 선배들은 너무 잘하셔서 저보다 훨씬 나았다. 내년에는 저도 승부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멋진 경기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준우승한 이창호 9단은 “예전 느낌을 되살리는 것 같아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고 돌아봤다. ‘스승’인 조훈현 9단과 311번째 맞대결을 펼쳐 승리한 것에는 “조훈현 9단뿐 아니라 네 분 모두와 다시 오랜만에 대국해서 기뻤다”고 겸손함을 보였다.
초반 2연승으로 선두를 달리다가 3위를 차지한 서봉수 9단은 “연승을 막은 이창호 9단이 밉지는 않다. 그러나 그날 제가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시상식에는 대회 후원사인 전자랜드 홍봉철 회장과 옥치국 대표이사, 한국기원 양재호 사무총장, 김인 이사, 양건 기사회장 등이 참석해 한국바둑의 전설 입상자들을 축하했다. 시상식 인사말에서 홍봉철 회장은 “존경하는 다섯 분을 모시고 대회를 할 수 있어 즐겁고 감사했다”면서 “내년에는 준비를 잘 해서 더 좋은 대회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김기중기자 k2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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