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 여행은 정신력과 체력 싸움이다. 늘 잘 먹어야 한다. 탕탕과 여행을 결심했을 때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천운이 있었으니, 바로 식사다. 탕탕은 프렌치 가이. 프랑스 남자는 요리를 잘할 것이라는 예견이 이토록 꼭 맞아 떨어질 줄이야. 나이만큼 따라붙는 꼰대 기질 대신 그에겐 천혜의 손재주가 있었다. 쓰러질 것 같은 부엌에서 제한된 재료로 5성급 요리를 만드는 저 미다스의 손! 그를 요리사로 데려간 건 아닐까? 프로이트까지 소환해 나도 몰랐던 무의식을 의심할 정도였다.
멕시코를 떠나니 식당 찾는 재미가 확 줄었다. 길거리 음식부터 고급 식당까지 차원을 달리했던 먹거리 도전은 잿빛처럼 사라졌다. 온두라스 상황은 특히 심각했다. 이 나라는 어찌된 게 구이와 튀김으로만 요리법이 종결된다. 점심은 닭가슴 구이, 저녁은 닭튀김, 다음날 점심은 닭다리 구이다. 배를 가르면 닭이 몇 마리는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밥, 밥, 밥. 때론 기름덩이 중국 음식을 오히려 구원자라 생각했다. 그들의 식습관인 초저녁 식사에 동참하지 않는 책임도 있었다. 밤늦게 가면 오로지 ‘닭집’만이 환영했다. 식당 문 앞에선 어김없이 닭살이 돋았다.
만만찮은 가격도 적수였다. '여행자를 위한 식당'에는 ‘돈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달려야 했다. 요리의 폭이 넓은 만큼 가격의 수위가 높았다. 때론 서비스란 이름의 영문 모를 세금이 여행자를 당황케 했다. 한번쯤 분위기를 낸다 해도, '잦은 외식은 가정 경제를 무너뜨린다'라는 기초경제학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현지인 식당에서 일명 ‘오늘의 메뉴(애피타이저+주요리+음료)’만 먹다가는 기아에 허덕일지도 모르는 상황. 결국 탕탕은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자신의 요리 솜씨를 발휘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장기 여행을 준비한다면 요리 공부를 추가해도 좋겠다.
자, 숙소로 돌아가자. 5성급 요리는 갖가지 재료와 모든 도구가 잘 갖춰진 부엌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중남미 숙소에서 이런 조건은 '해당사항 없음'이다. 칼은 용도를 잃은 지 오래요, 프라이팬은 폐기처분 직전이다. 이런 악조건에서 오로지 요리에 대한 경외심에서 우러나온 탕탕의 레시피를 공개한다. 단, 3분 요리 조바심은 사절. 한국에서도 전자레인지용 냉동요리와 인스턴트식품으로 연명했던 나 역시 가장 참기 힘들었던 대목이기도 하다. 맛을 향한 기다림과 탐미가 요리의 8할이다.
※주의: 요리 그림의 색채는 실제와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이니까요. 웹툰 ‘역전! 야매요리’의 말투 표절 의혹. 정다정 작가여, 그대의 언어를 일부 차용하매 용서하시길.
▦온두라스 역습 치킨
① 버터(식용유보다 권장)가 보글보글한 프라이팬에 취향에 따라 부위별로 자른 생 닭을 굽는다. 여기에 소주잔 정도의 화이트 와인과 식초를 조르륵. 요리하면서 화이트 와인은 마셔도 좋다. 취기 in 요리.
② 무조건 큰 냄비를 선수 쳐서 차지. 장차 닭이 친히 들어가 소스와 버무려질 예정. 원하는 소스의 양만큼 물을 붓고 치킨 수프용 분말 가루를 넣고 휘휘 젓는다. 여기에 알아서 소금 조금, 후추 조금, 와인 조금.
③ 또 다른 프라이팬을 공수. 양파와 마늘을 넣고 식용유 없이 불에 지진다. 여기에 와인 조금, 식초 조금. 이때 허브 가루를 뿌리면 그윽한 맛과 향을 만날 수 있으나 목숨 걸 필요는 없다
④ ③의 내용물을 잠시 접시에 피신, 눈치 보이니 이 프라이팬을 재사용해 4등분한 감자를 굽는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암에 걸릴까 걱정될 때까지 바싹. 감자 굽기는 찌그러진 프라이팬으론 호락호락하지 않아 30분 이상은 소요된다
⑤ 조리된 양파와 마늘을 ②의 냄비에 투척! 섞어주세요! 머스터드 소스도 본능적으로 원하는 만큼 투척. 원칙상 큰 수저로 2큰술 정도다.
⑥ 자, 회합의 시간. ②의 냄비에 ①의 치킨을 퐁당! 간을 보고 식초나 와인 추가 여부를 판단한다. 괜찮다 싶으면, 100g의 요리용 크림을 아낌없이 붓는다.
⑦ 작은 불로 끓인다. 젓는다. 소스 맛을 다시 탐미한다. 더 필요한 게 식초? 혹은 와인? 체크한다.
⑧ 소스가 앙큼한 거품을 낼 때가 바로 먹을 시간. 대형 접시에 구운 감자와 식초에 빠진 크림 치킨을 담아낸다. 빵과 같이 먹을지는 선택 사항.
⑨ 남은 소스로 삶은 파스타와 한 끼 더?! 온두라스야 좀 배워줘. 끝
* 소요 시간 : 숙소의 가스 불을 몇 개 쓸 수 있느냐에 따라 1시간(3개)~2시간 이상(1개)
▦이틀 요양 샐러드
① 탕탕 소스 먼저. 식초를 부은 컵에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머스터드 소스를 넣은 뒤 섞는다. 이때 썬 마늘이나 양파를 첨가하면 일품. 마지막으로 식용유를 넣고 다시 손목 스냅. 순서는 그대로. 뒤바꾸면 요상한 이물질을 보게 될 것이다.
② 장 볼 때 감자는 최대한 작은 크기로(특히 안데스 감자). 삶을 때 물에 소금을 넣고 끓인다.
③ 계란도 물론 삶아야겠지? 귀찮으면 ②와 같이 섞어 삶아도 생명에 지장 없다
④ 숙소엔 샐러드 볼이 보통 없다. 무조건 큰 냄비를 선점(예상보다 양이 50% 이상 불어날 것). 입 크기에 맞게 썬 채소, 치즈와 함께 4등분한 삶은 계란과 감자를 한 자리에 모은다.
⑤ 소스와 함께 모든 재료를 쑥덕쑥덕 섞는다.
⑥ 냄비 속 잡탕식 샐러드를 접시에 담아낼 땐 정갈하고 아리땁게.
⑦두세 접시 해치워도 냄비엔 내일을 기약하는 양이 남아 있다. 샐러드를 빵으로 밀어내며 먹는다. 임시 채식주의자로 정신 수양에 힘을!
* 소요 시간 : 10여 가지 재료로 만들 시 40분. 여행 동지가 야채 썰기를 도와주지 않으면 1시간 10분.
▦다짜고짜 새우구이
① 프라이팬에 새우를 가지런히 눕힌다. 팬이 달궈지면 새우가 공중부양할 수 있으니 뚜껑은 덮을 것. 새우에서 빠져나오는 물기를 매몰차게 버린 후 소금과 후추, 적은 양의 럼을 붓고 다시 불의 화신 속으로.
② 새우 색깔이 핑크빛에서 붉은빛으로 전환될 때(보통 5분 후, 사이즈에 따라 다름) 잘게 썬 마늘을 송송 뿌려준다.
③ 마늘이 살짝 까맣게 될 때 럼을 왈칵! 파이어! 미슐랭 3스타 셰프, 저리 가소.
④ 새우와 마늘을 돌려차기 해가며 섞는다.
⑤ 다짜고짜 먹는다. 재빠르게 먹는 것이 포인트. 서로 대화가 없을 수 있다는 점이 함정이다.
* 소요 시간 : 한 접시당 10~15분. 네 접시면 1시간이 또 훌쩍
▦신맛 홍시 토마테 데 아볼
① 토마테 데 아볼의 껍질을 사과처럼 깎는다. 이후 큰 냄비 밑바닥에 서로 겹치지 않게 정렬한다. 물은 과일이 덮일 정도만 넣고 끓인다.
② 12개 토마테 데 아볼 기준, 자신의 단맛 수위에 따라 최소 500g~1kg의 설탕이 필요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붓는다.
③ 낮은 불로 끓인 토마토 데 아볼이 물러지고 물이 거의 사라질 때가 조리 끝. 냄비가 차가워질 때 냉장고에 넣는다.
④ 기다린다. 냉장고에 보관할 때 천연 주스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⑤ 최소 하루 지나 먹는다. 주스에 담긴 토마테 데 아볼과 버터 쿠키를 함께하면 다이어트는 저 멀리에.
* 소요 시간 : 원하는 질감에 따라 3~5시간
▦여행의 선물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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