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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국어사전 꺼내게 만드는 야권의 ‘단어 뜻’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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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국어사전 꺼내게 만드는 야권의 ‘단어 뜻’ 논쟁

입력
2016.02.1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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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선대위-비대위 연석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선대위-비대위 연석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궤멸(潰滅): 무너지거나 흩어져 없어짐. 또는 그렇게 만듦’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관계자들이 최근 ‘궤멸’이라는 단어 때문에 국어사전을 펼치는 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의 등장은 지난 9일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북한이 핵이나 개발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쏜다고 해서 체제가 장기적으로 절대 유지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북한 체제가 궤멸하고 통일의 날이 올 거라고 확신한다”고 발언한 이후부터입니다. 발언이 공개된 직후 국민의당은 “북한 궤멸 발언은 수구보수세력의 흡수통일론과 궤를 같이 한다. 더민주는 흡수통일로 노선을 바꾼 것인가. 사과하라”고 날 선 비판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김 대표는 “국민의당에서 이야기 한다고 내 생각을 바꿀 것 같으냐”며 “(궤멸) 그게 무슨 뜻인지 국어사전을 보라”고 응수했습니다. 이 때부터 국민의당은 공격을 위해 더민주는 수비를 위해 각자 국어사전을 펼쳐 듭니다. 우선 수비에 나선 더민주는 ‘궤멸’이란 공격적인 말에 대해 “‘자멸’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궤멸의 한자 해석 순서상 ‘그렇게 만듦’보다 ‘무너지거나 흩어져 없어짐’이 먼저인 점에 착안, 외부적 압력이 없는 자멸에 가까운 뜻으로 김 대표 발언을 이해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국민의당은 더민주 해명에 어이없어 했습니다. 그리고 공격의 선봉에 최근 연이어 국민의당에 합류한 신임 대변인들이 섰습니다. 김희경 대변인은 10일 “궤멸이든 자멸이든 그 동안 제1야당이 추구해왔던 대북포용 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흡수통일론에 근거한 발언으로 이해하기 충분하다”며 “김 대표가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비웃고 한반도 평화통일 정책까지 뒤흔들고 있다”고 맹공을 폈습니다.

국민의당의 강한 반발에도 김 대표가 특별한 해명을 내놓지 않자 김정현 대변인이 다시 나섰습니다. 김 대변인은 11일 “김 대표가 자신의 북한 궤멸론을 거둬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햇볕정책에 대한 정면부인”이라며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안보 무능과 남북관계 파탄 책임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북한의 궤멸을 이야기한다면 제1야당의 수장으로서 김 대표의 자격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대변인은 13일에도 같은 취지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김 대표가 11일 자신의 북한 궤멸론에 대해 “다 생각이 있어서 말한 것이니 이해해주기 바란다”라고 더민주 비대위원들에게 설명한 것이 12일 알려지자, 궤멸론 이슈를 재차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는 “김 대표가 북한 궤멸론을 취소하지 않겠다고 거듭 밝힌 것은 햇볕정책과 결별을 선언한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김 대표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는 대표직으로 위상을 강화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자리를 떠나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새누리당)과 정치를 해야 할 것”이라고 거듭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4일에는 신임 대변인에 이름을 올린 장진영 변호사가 공세 대열에 마지막으로 합류했습니다. 장 대변인은 이날 김 대표의 북한 궤멸론에 대해 ■더민주는 햇볕정책과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폐기하고 김 대표의 북한 궤멸론과 ‘결과로서의 통일’로 바꾼 것인가 ■더민주 소속 의원들은 김 대표가 “생각이 있어서 궤멸론을 말한 것”이라며 이해해달라는 요청대로 이해해 주기로 한 것인가 ■김 대표의 북한 궤멸론이 더민주의 당론이 아니라면 당 강령에 반하는 발언을 유지하는 당대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총선용’인가 ■북한 궤멸론에 의하면 개성공단은 속히 폐쇄되어야 마땅할 것인데 더민주가 “개성공단 운영중단조치를 재검토할 것”을 주장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 당 차원에서 4가지 답변을 더민주에 공개적으로 요구했습니다. 장 대변인은 “우리는 더민주가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할 때까지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할 것”이라고 북한 궤멸론 문제 제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김 대표의 발언이 이처럼 야권에서 큰 논란이 된 이유는 궤멸이 가진 정치사적 함의와 현 야권의 경쟁 구도, 이렇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국민의당 대변인들이 거듭 강조했듯, 역사적으로 ‘북한 체제 궤멸’ 프레임은 여당의 통일 정책의 근간인 것은 사실입니다. “북한 체제 붕괴를 유도해 흡수 통일을 해야 한다”는 보수 진영의 통일 기조가 투영된 궤멸론은 DJ정부 이후 야권의 ‘협력을 통한 평화 통일론’, ‘햇볕정책’과 명확하게 정반대의 개념이기도 합니다. 이런 단어를 제1야당의 수장이 공개적으로 사용한 것은 그 자체로 논란의 여지는 충분한 셈입니다.

하지만 총선 준비로 갈 길이 구 만리인 두 야당이 과연 정치사적 함의만으로 싸웠을까요? 논란의 핵심은 결국 후자, 야권의 경쟁 구도 때문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두 당은 이미 호남 민심은 물론, 총선에서의 주도권 싸움을 시작한 상황입니다. 가장 먼저 지난해 연말 보수정권 정통성 인정 여부를 두고 한상진 국민의당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의 ‘이승만 국부’ 발언으로 한 차례 신경전을 벌였고, 김 대표 취임 이후에는 야당 정체성의 근간인 5ㆍ18 정신과 상반되는 그의 국보위 전력을 두고도 설전을 벌인 바 있습니다.

제1야당의 자리는 하나입니다. 경쟁자의 낙마와 실패는 당연히 자신의 정치적 이익으로 흡수되는 구도인 것입니다. ‘살아 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정치권의 격언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 상황에선 여당보다 오히려 경쟁 야당의 실수를 철저히 물고 늘어져 자신들의 ‘야권다움’과 존재감을 피력하는 것이 필수라는 얘깁니다.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투쟁. 더민주는 물리지 않아야 하고 국민의당은 더 물어뜯어야 한다는 절박함. 이것이 ‘단어 뜻’ 논쟁의 본질입니다.

여기에 부수적인 이유가 하나 더 존재합니다. 국민의당 입장에선 창당 직후 더민주가 ‘이승만 국부’ 발언을 문제 삼은 것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국민의당은 반격의 의미로 김 대표의 국보위 경력을 적극적으로 문제를 삼았지만, 김 대표가 5ㆍ18 국립묘지에서 무릎까지 꿇으며 사죄하면서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된 경험도 있습니다. “이번만큼은 끝을 보겠다”는 각오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런 야권의 이전투구는 총선 전까지 지겹도록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언젠가 두 야당이 선거 연대를 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지만, 현재로선 그 확률이 상당히 낮다는 게 중론입니다. 야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양당 내부에서 호남은 개별 전투, 수도권은 전략적 후보 연대 이야기가 솔솔 나오지만 국민의당이 쉽게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그 고생을 하며 당을 만들었는데,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더민주와 연대하는 건 당 존재를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금명간 두 당이 또 어떤 단어를 두고 국어사전을 펼칠 공산이 크다는 말입니다.

정재호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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