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처럼 걸판진 이야기 한 상 손수 차려 인생의 쓴맛, 단맛, 신만, 짠맛을 아낌없이 나눠주던 무학(無學)의 광대. 하지만 혼자 배우고 익히다 보니 오히려 지혜롭고 특별했던 사람. 몇 해 전 세상을 떠났으나 여전히 친근한 이름으로 다가오는 공옥진이라는 유명한 예인의 이야기다.
1970년대 말 서울 한복판에 느닷없이 나타나 병신춤과 1인 창무극이라는 파격적 토속 예술로 한 시대를 풍미한 그녀는 야성 넘치는 저잣거리 독공(篤工)으로 도회지 현대인들의 마음을 일거에 뒤흔들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놀래키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성공시대를 펼쳐나갔다. 무대 위 그녀의 진술을 빌자면 이렇다. “촌년이 참말로 출세했지라!”
겸손한 인사말은 무대 위에서는 해학이었지만 무대 바깥에서는 사실이기도 했다. 전남 승주군(현 순천시)에서 1931년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1933년에 태어났다고도 했다. 지역에서 소문난 광대 집안이었으되 그 시절 광대들의 삶이 대개 그러했듯 그리고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이 그러했듯 대단히 가난했다.
문전걸식에 몸종…가난했던 어린 시절
여덟 살 코흘리개 시절,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에나 간신히 입학할 어린 나이에 생면부지 사람의 몸종이 되어 집을 나섰다. 심봉사도 심청이도 아니었건만 아버지가 돈 몇 푼에 팔아 넘겼다고 했다. 그를 부린 사람 가운데 식민지 시대 가장 유명했던 무용수 최승희가 있었다고 해서 불우했던 성장기를 달리 볼 것은 없다. 몸종은 몸종이었을 뿐.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공옥진은 10년 가까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바다 건너 일본에서 몸종 등으로 지내다가 전쟁의 화마를 피해 한국으로 겨우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따뜻한 가족의 품은커녕 문전걸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불우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다행히 가족과 상봉한 후에는 집안의 소리 내력을 따르고 익혀 어느 명창대회에 나가서 장원도 차지하는 등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모두 가족을 건사하기 위한 힘겨운 노동이었을 뿐, 삶의 형편은 이후에도 딱히 나아질게 없었다.
그녀의 삶이 극적으로 뒤바뀐 것은 1978년,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쉰 살을 목전에 둔 시점에 이르러서였고 역설적이게도 무학의 삶을 살았던 그녀의 남루한 인생 여정에서 비롯되었다. 공옥진의 후일담이 이렇다. “앉은뱅이, 꼽추, 절름발이, 외팔이, 사팔뜨기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어. 동냥 다녀와 배불리 먹고 나면 노래하고 춤추며 한바탕 놀았지.”
숱한 사연을 품은 고달픈 인생의 궤적도 훗날 뒤돌아 보면 풍요로운 배움터로 바뀌어 있다. 저자거리의 토속적인 소리와 짓궂은 몸짓, 재담은 누구보다도 불우했던 공옥진의 인생역정을 통해 1인 창무극으로 재탄생했다. 병신춤이든 재담이든 소릿자락이든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옥진을 통해 재현된 것은 동시대에 제도화의 기틀을 닦았던 전통예술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파격이었다.
저자거리 소리ㆍ몸짓을 창무극으로
이미 1960년대에 이르면 전통예술의 주류는 보호와 전승 체제로의 완전한 편입을 지향하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전통 및 민속예술의 부흥을 주요한 정책 과제로 표방했고, 미국에 설립된 아시아재단이나 록펠러재단 등의 해외 문화원조를 받아 홀대 받던 전통예술을 향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1962년에는 무형문화재 제도가 실시되었고 1960년대 이래 40년간 지속된 민속예술경연대회가 정부에 의해 개최되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퓨전적 아이템을 개발하며 시장에서 분투했던 전통 예인들은 어느새 스스로를 보호전승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제도적 지원의 규모를 자신들의 성취 기준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1962년 어느 신문기사에 이런 내용이 실렸다. “국악의 성세가 오늘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적이 일찍 어느 때에 있었단 말인가. 국악사양성소를 보라, 국악예술학교를 보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국악과를 보라.”
제도에 의탁하기로 한 전통 예인들의 기획은 지극히 성공적이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무형문화재 제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국악의 얼개가 정의되었고 고착되었다. 보호전승제도 하의 전통예술 개념은 지금까지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데, 예술은 이제 창작자들의 독창적 세계관 및 행위를 통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원형성을 부여 받은 소수의 작품 및 스타일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되었다. 제도로 편입되지 못한 숱한 전통들은 소멸의 운명에 맞서 시장에서 외로운 분투를 계속해야 했고 예인들의 독학은 더욱 불가피한 것이 되어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예술의 본령은 독학에 있다. 특히 소리꾼들에게 독공(篤工)의 형식은 애시당초 독공(獨工)이기도 했다. 게다가 계보와 관습 그리고 ‘전형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는 무형문화재법으로부터 독립적인 예술가들은 자기검열의 최소화를 통해 창의력을 최대치로 뽑아낼 조건에 놓인 것이기도 했다. 삶은 벼랑 끝에 처했어도 예술엔 날개가 달려 있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20세기 전통예술 분야를 통틀어 가장 독창적인 경지를 보여준 이가 저잣거리의 공옥진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임방울, 김연수, 박녹주 등 당대의 대가들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으나 스승의 발성과 몸짓을 간절하게 익히는 대신 거리를 스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갈망했다. 거기에 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시장판에서 분투했고 그 과정에서 1인 창무극의 자산을 마련하였으며 병신춤이라는 새로운 변경에 다다랐다. 물론 그 변경을 넘어가면 옥토가 펼쳐질지 천길 낭떠러지가 나타날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의 인생에 옥토가 펼쳐진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훗날의 놀라운 성취 따위, 추측건대 감히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환호와 단절…제도권 바깥 예인의 숙명
1978년 공간사랑에 첫 모습을 선보인 이래로 공옥진과 그의 예술은 전통예술계에 전례가 없을 만큼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국내외를 종횡하며 수많은 공연을 펼쳤고 대학가 축제시즌에는 섭외 1순위로 꼽힐 만큼의 인기몰이도 했다. 영화, 드라마에 직접 출연하기도 하고 미군가족 위안 디너쇼 같은 곳에도 당대 최고 인기의 대중음악인들과 함께 섭외되었다. 공옥진을 다룬 소설, 드라마, 다큐멘터리도 속속 등장했으니 전통예술계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명성은 수십 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옥진의 예술이 칭찬 일색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황병기는 1982년 12월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공옥진의 병신춤이 ‘통속화’했다고 비판했다. 누군가는 식상하다고도 했고 누군가는 약자를 비하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공옥진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역설적으로 그의 예술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제도였다. 보호전승 중심의 제도는 공옥진의 예술에 대해 오래도록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평가하지 않았으므로 가치 있는 고전으로 수용하지도 않았다.
1996년 한 잡지사가 대학생을 상대로 수행한 여론조사에서 공옥진은 김덕수, 백남준을 제치고 우리나라 인간문화재로 지정하고 싶은 인물 1위로 꼽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기에는 법령이 모호했고 후속세대가 등장하기에는 1인 창무극의 앞날이 불투명했다. 다소 의아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공옥진의 예술은 전통적인 동시에 독창적이었기 때문이다. 제도 바깥에서 독학을 통해 예술적 성취에 다다른 대가였을까. 비록 그답지 않아 보이지만 공옥진은 무척 답답해했다. “문화재의 ‘문’자만 들어도 가슴이 무너집니다.”
아쉬워해야 할 일인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갈릴 수 있겠지만, 저잣거리 독학을 통해 탄생한 공옥진표 병신춤과 1인 창무극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더 이상 재현되지 않고 있다. 국가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제도적 보호 대상, 지원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보호전승을 수행할 후속세대가 등장하지 않은 것이다. 나중에야 지자체 차원의 문화재로 지정되긴 했으나 그것은 때늦기도 했거니와 사실상 명예적 성격의 것이었다. 이처럼 공옥진 개인은 인생에서 성공하였으되 독학으로 성취한 그녀의 예술세계는 고전의 대열에 합류하는 데 실패하였다. 독학광대의 삶이 예정한 운명이었으리라.
김병오 전북대 산학협력단 교수ㆍ음악학
공동기획: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