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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명절과 숫자

입력
2016.02.1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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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의 명절 설을 맞아 모처럼 온 가족이 안동 고향집으로 총출동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 형제는 7남매고, 어머니는 10남매다. 다들 결혼했으니 이쪽은 14명, 저쪽은 20명이겠고, 한 집마다 평균 2명의 자식을 낳았으니 다 모이면 이쪽은 28명, 저쪽은 40명이라는 이야기다. 사촌오빠의 결혼식 날, 일가친척들이 하도 많아 한 프레임 안에 다 안 들어오자 가족사진 촬영을 3차까지 나눠서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어마 무시한 인원이다. 부디 정부는, 엄청난 생산자와 소비자를 일생에 거쳐 배출(?)한 할머니와 외할머니에게 1계급 특진의 영광과 함께 손녀 동반 해외여행을 쏘기 바란다.

평소 집단체제를 좋아하시는 아버지께서 ‘설을 맞아 우리도 뭉쳐야겠다. 너는 언제 내려오느냐’ 물어보시었다. 흠, 생각해 보자. 누구일까…. 재수하고 있는 수험생도 없고, 취업을 해야 하는 나잇대의 사촌도 없다. 대졸자 취업경쟁률 평균 32.3:1인 이 어려운 시기에 취직한 사회 초년병들이 5명이나 있으니 그들은 ‘우쭈쭈쭈’ ‘궁디팡팡’ 칭찬받아 마땅한 상황이다.

2015년 기준 결혼 예상 평균 나이가 남자는 31~35세고 여자는 28~33세다. 또한 ‘한국인 표준 사이즈’를 보면 여성의 평균 신체 치수가 키 160㎝, 가슴둘레 82.2㎝, 허리둘레 67.3㎝, 엉덩이둘레 90.8㎝라고 한다. 혼기가 꽉 차다 못해 마지노선에서 밀릴 대로 밀려 나온 사람은 오직 나뿐이요, 평균 몸매 기준보다 푸근한 통통족 또한 오직 나뿐이다. 나네. 나여. 민족대명절마다 하는 민족대면접, 이번 공격대상은 나일 것이었다.

아버지께 이번 설은 못 갈 것 같다고 말씀 드렸다. 왜 못 오냐고 물어 보시기에 ‘갈 기분이 아니에요’ 하고 솔직히 말씀 드리려다 등짝 스매싱을 맞을 것 같아서 “왜 못 갈까~요, 4개 중에 하나 맞춰 보세에~요”라고 했다. 1번 “그날 갑자기 배가 아플 것 같아요”, 2번 “요즘 방광염이 심한데 가다가 밀리면 화장실은 어떡해요, 차 안에서 되돌릴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어요”, 3번 “전북 익산에서 할랄 음식이 배달오기로 했어요, 중요한 택배기 때문에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4번 “방송 있어요”. 아버지가 웃으면서 말씀 하신다. “아아~ 방송 있구나. 알았어 오지마.” 오 예, 좋았어!

친척들은 명절만 되면 뜬금없이 숫자 놀이를 한다. 학창시절에는 반에서 몇 등이나 하냐고 물었고 고3 때는 수능 몇 점이나 나왔냐고 물었다. 취직했을 때는 연봉이 얼마냐고 물었고 그 다음에 만나서는 몇 살에 결혼할 거냐고 물었다. 또 다음엔 얼마나 모아놨냐고 물었고, 지난번엔 지금 사는 곳 월세는 얼마냐고 물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는데요? 나는 그들의 포괄적 걱정에 맞춤형 숫자를 답할 자신이 없다. 이런 잔소리가 싫어 설날에 내려가지 않은 것이 벌써 4년이나 지났다. 그때 이후로 나는 떡국을 먹지 못 했다. 그러니 내 나이는 서른에서 멈춘 것이 마땅하다.

와불처럼 누워서 짐승의 시간을 보내다가 설날 전 날, 잔소리가 싫어 내려가지 않은 또 하나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내일 뭐하냐, 아침에 만나서 떡국이나 사먹을까?” 그랬더니 그녀 왈. “야, 우리 회사~ 설날 당일에 정상 근무한대.”

설날 당일에 정상 근무 하는 게 정상인가 싶다. 또한 딱히 해결 방안도 없으면서 이것저것 지적질만 해대는 것도 정상인가 싶다. 나는 이 다음에 관심을 빙자해 곤란한 질문을 하고서는 마침표를 찍어 주지 않는 무책임한 어른은 되지 않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다른 괜찮은 방법도 있을 것 같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한스 크루파의 ‘영원과 하루’를 읽기 시작한다.

‘행복한 사람은 의미를 따지지 않으며, 그냥 살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삶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인생을 즐긴다.’

남정미 웃기는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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