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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숫자 ‘0’(영ㆍ零)은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 0의 개념을 정립하고 사용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 0을 하나의 수로 인식하고 계산에 적용한 것은 인도인들이었다고 한다. 인도 수학자 브라마굽타는 628년에 쓴 책‘우주의 창조’에서 0을 “같은 두 수를 뺄셈하면 얻어지는 수”라고 정의했다. 그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상태”가 0이고 이는 실제 수(數)라고 주장했다. 0을 사용한 숫자 표기와 계산법 발명은 인류 문명사에 일대 사건이었다.
▦ 그런 0의 개념을 다시 곱씹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개성공단 전면중단 조치로 남북관계가 말 그대로 0의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멀게는 1972년 7ㆍ4 남북공동성명과 노태우 정부시절인 1988년의 7ㆍ7 선언, 가깝게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공들여 쌓아온 남북교류협력의 성과가 완전히 무(無)로 돌아갔다. 온갖 악재에도 남북화해와 공동번영을 위한 실낱 같은 꿈을 꾸게 했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이기도 하다. 평화의 안전판이니 남북경협의 상징이니 하는 말들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 남측 124개 기업이 입주해 있던 개성공단은 남과 북의 노동자 5만5,566명(남 803명, 북 5만4,763명. 지난해 11월 기준)의 생계터전이기도 했다. 금강산관광 중단 경험에 비춰 입주 기업들이 처할 운명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상대적으로 풍족함을 누렸을 북 노동자와 그 가족 20만 명의 생계는 또 어떻게 될까. 남과 북 젊은이들의 웃음과 얘기꽃이 무성했던 개성공단은 조만간 잡초 무성한 폐허가 되거나 되돌아온 북한군의 막사 또는 총포의 엄폐 시설이 되기 십상이다.
▦ 남북관계 전면 단절이 김정은 집단에 얼마나 실질적 압박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남북경협 중단과 경제봉쇄의 최대 피해자는 애꿎은 일반주민들이 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남북관계 0 상태의 비극이다. 역학(易學)에서 영은 우주가 생기기 전의 혼돈상태 또는 새로운 시작의 씨앗으로 비유된다고 한다. 남북관계 0을 꼭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의 남북관계 혼돈, 영의 상태가 새로운 질서로 거듭나기까지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하는지 아득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계성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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