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방송가에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걸그룹 EXID 멤버인 솔지가 지난 8일 오후 5~6시 시간대에 전파를 탄 지상파 방송 3사 예능프로그램에 동시에 출연해 시청자를 당황케 했다. 방송가에서 동 시간대 겹치기 출연은 금기다. 시청자에게 혼란을 줘 방송에 대한 몰입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 KBS와 MBC, SBS가 이를 고려하지 않고 동일 인물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동시에 내보내 구설을 자처했다.
솔지가 출연한 프로그램은 KBS2 ‘전국 아이돌 사돈의 팔촌노래자랑’과 MBC ‘듀엣가요제’, SBS ‘먹스타 총출동’이었다.
이 가운데 출연자가 아이돌 위주로 꾸려진 KBS와 MBC 프로그램에서는 솔지가 노래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 식상함을 더할 수 밖에 없었다. 지상파 방송 3사가 아이돌에 지나치게 의존해 설 특집 프로그램을 꾸리다 보니 벌어진 씁쓸한 풍경이다.
올해 방송사 설 특집의 아이돌 편중은 지난해 추석 특집보다 더 심해졌다. 지난 6일부터 10일까지 이어진 설 연휴에 지상파 방송 3사에서 전파를 탄 특집 중에 아이돌만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은 ‘아이돌스타 육상 씨름 풋살 양궁 선수권대회’ 등 4개(특집 중 33%)로, 추석 특집(3개ㆍ25%) 때보다 1개 더 많아졌다. 출연자 절반 이상이 아이돌로 꾸려진 ‘듀엣가요제’ 등까지 고려하면 아이돌 없이 어떻게 설 특집 방송을 꾸렸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다. 지상파 방송3사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즐기는 명절 특집 프로그램 기획에 다양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매체 모니터링 단체 미디어세상 열린사람들의 주정순 국장은 “프로그램을 어떻게 새롭게 만드냐보다 아이돌을 어떻게 자극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골몰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시청자들의 눈살을 더 찌푸리게 했던 건 아이돌을 다루는 방송사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었다. 지난 6일 방송된 SBS ‘사장님이 보고 있다’에서는 비투비 등 아이돌그룹 멤버들이 각 소속사 사장 앞에서 여장을 하고 춤을 추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아이돌이 소속사 고위 관계자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는 것처럼 보여 불편함을 줬다.
돌발 상황에 아이돌이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지를 보여준다는 컨셉트를 내세운 KBS2 ‘본분 금메달’ (10일 방송)은 EXID 멤버 하니 등 여성 아이돌에게 모형 바퀴벌레를 던져 주고 놀라는 모습을 슬로 비디오로 담아 내보내는 등 가학적인 모습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제 의식 없이 ‘출연자 몰래 슬로 카메라로 찍은 무허가 영상입니다’란 자막을 자랑하듯 고지한 점은 이 장면이 공영방송에서 전파를 타고 있는 게 맞는지 눈을 의심케 할 정도였다. 프로그램 시청자 게시판에는 ‘왜 여자(아이돌)들 데려다가 평가를 하나. 걸그룹의 본분이 무엇인지 방송국에서 왜 정형화 하는 건가’(오*은) 등 비판의 글들이 굴비 엮이듯 이어졌다. 정석희 방송평론가는 “올해 아이돌 설특집 프로그램은 유독 자극적이라 아이돌이 시청률을 위해 상품화되는 안타까움마저 들었다”며 “방송사의 어린 아이돌에 대한 갑질로도 비칠 수 있으니 방송사가 앞으로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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