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불안 시달리는 비정규직 확산
이중적 노동시장은 사회갈등의 근원
제도와 법으로 임금 격차 줄여야
고교 동창 A는 용역 근로자다. 젊어서는 대형 보험사에서 일했다. 그 사건만 없었더라면 중산층의 안온한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997년 외환위기는 대졸(서울의 유명 사립대) 정규직의 평범한 일상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당초 부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진행되던 구조조정은 신청자가 적다는 이유로 과장급까지 내려왔고, 그래도 희망자가 많지 않자 표적 퇴출작전이 이어졌다. 직장을 잃은 A는 그간 모아놓은 돈과 퇴직금으로 IT사업도 해보고 식당도 열었으나 투자금을 까먹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본이 바닥난 그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택시운전을 몇 년 하다가 3년 전부터 서울의 한 오피스빌딩에서 주차요원으로 일한다. 용역회사 소속으로 보수는 월 170만원. 건물주는 2년마다 최저가 입찰을 통해 관리업체를 바꾼다. 다행히 A가 속한 회사는 작년 말 경쟁입찰에서 관리업무를 다시 맡았다. 2년 전 입찰가격과 비슷한 액수를 써냈다고 한다.
현재 직원은 20명. 관리 용역비가 2년 전 수준이라 급여를 동결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최저임금이다. 내년에 시간당 최저임금이 450원 오르기 때문에 현재 월 116만원(주 40시간 근무기준)인 경비원 8명의 급여를 10만원씩 올려줘야 한다. 직원을 모두 유지하려면 나머지 12명의 급여를 깎을 수밖에 없다. 결국 용역회사는 직원 1명을 내보내기로 했다. 2년 전에도 최저가를 적어내느라 22명이던 직원을 20명으로 줄였다고 한다.
이 빌딩 건물주만 그런 게 아니다. 상당수 대형 빌딩이 최저가 입찰을 통해 관리업체를 정한다. 건물관리 능력이나 용역회사의 재무상태 등은 뒷전이고 오로지 비용 절감에만 신경 쓴다. 근로자 입장에선 죽을 맛이다. 해가 바뀌어도 급여는 제자리인 상태에서 노동강도만 세지기 때문이다. 건물주 요구에 맞추려면 직원들을 계속 줄이는 수밖에 없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정부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임금 노동자 1,800만 명 중 3분의 1은 비정규직이다(노동계 주장은 900만 명). 이들의 급여는 정규직의 절반에 불과하다. A가 속한 용역회사는 최저임금이라도 주지만 중소 영세사업장은 이마저도 그림의 떡이다. 세계 최저수준인 최저임금조차 못 받는 근로자가 230만 명을 넘는다. 전체 노동인구의 27%를 점하는 자영업의 현실은 더 암울하다. 세금을 내지 않고 사회보험 혜택도 못 받는 비공식 노동자가 수두룩하다.
역설적이게도 2007년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된 이후 임금 격차는 더 벌어졌고 고용의 질도 나빠졌다. 임금이 줄어든 계약직을 더 싼 임금의 파견ㆍ용역ㆍ도급 등 간접고용으로 바꾸거나 시간제 노동자로 대체한 것이다. 기업 규모가 클수록 사내하청, 분사 등 온갖 방식으로 비정규직을 늘려간다.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조차 청소ㆍ경비ㆍ식당은 물론 간호조무와 환자이송 업무까지 간접고용으로 돌리고 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 노동을 시켜 최고의 수익을 창출하려는 고용방식이 한국사회를 거의 점령했다.
지금처럼 시장논리에만 맡겨서는 차별적이고 이중적인 노동시장을 고치기 어렵다. 미국의 최저임금 수준은 평균 임금의 28.4%인 반면, 네덜란드는 41.5%다(2010년). 미국에선 간호보조 업무 종사자의 저임금 노동 비중이 38.2%나 되지만, 네덜란드에선 0%다. 미국은 시간제ㆍ기간제 근로자를 합법적으로 차별할 수 있지만, 네덜란드는 훨씬 강력한 고용보호법을 갖고 있어서다. 네덜란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보장 지출 비중은 미국의 2.5배다. 네덜란드에선 임금 양극화를 막는 사회 제도가 작동하는 셈이다.
A의 꿈은 소박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를 얻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라며 인간은 노동을 넘어서는 존재임을 역설했지만, A는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이라도 맘 편히 했으면 좋겠단다. 조금 욕심을 낸다면 매년 물가상승률을 웃도는 정도의 임금 상승이 이뤄지고 단돈 10만원이라도 저축할 여유를 갖는 것이다. A는 언제쯤 불안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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