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로 시작해보겠습니다. 20대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한 정치 신인의 다음 말에서 1번은 무엇(혹은 누구)을 뜻하는 것일까요?
“1번에게 허락 받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죠. 눈치 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정답은 아내입니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며 화제를 모은 김병관 웹젠 이사회 의장은 기자와 만나 정치를 시작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이 둘 키우며 게임회사 운영하는 40대 초반의 벤처사업가가 갑자기 정치를 하겠다고 하니 인생의 동반자 입장에서는 선뜻 납득이 가질 않았다는 것이죠.
4월 20대 총선을 앞두고 ‘여의도 입성’을 목표로 출사표를 던지는 이들에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것이 ‘아내’ 혹은 ‘남편’ 입니다. 그리고 아내(남편)에게 왜 정치를 하고 싶은지, 왜 정치를 해야만 하는지 등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고 입을 모읍니다.
이는 가족 중 선뜻 정치 참여를 동의하는 이들이 그 만큼 많지 않다는 뜻이죠. 무엇보다 정치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정치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본인이 정치에 뛰어들면서 자신이나 가족에게 유형, 무형의 갖가지 피해가 오지 않겠느냐는 걱정 때문에 가족들이 정치 참여를 말린다는 것입니다.
최근 더민주 입당으로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가져 온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조 전 비서관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정치를 결심하는 데 있어 마지막까지 가장 마음에 걸렸던 사람이 누구였나’라는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우리 아내”라고 했습니다.
그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잠시 짧은 한 숨을 내쉬며 “시집 잘못 와 가지고 뭔 고생인가 싶다”며 2014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을 언급했는데요. 정 전 비서관은 “그 때 저하고는 무관하게 언론에서 마치 저를 굉장히 잘 아는 것처럼 과시욕이 심하다고 예단하고 단정하고 몰아갔다. 특히 검찰이라는 국가 권력이 모든 힘을 다해 저를 향해 돌진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 생각에는 텔레비전을 켰다 하면 제가 나오는데 20년 같이 살아 온 자기 남편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나중에는 너무너무 두려워하더라”며 “그런 내가 또 정치를 하겠다니 분명 물고 뜯고 씹고 즐기고 할 텐데 나에게 그런 고통을 또 주게 하느냐. 감내할 자신이 없다고 하더라”고 했습니다.
자신이야 2년 전 문건 유출 사건 때 이미 ‘털릴 대로 털렸기’ 때문에 또 다시 털어봐야 더 나올게 없다며 짐짓 걱정 없다고 하지만 가족의 생각은 다를 가능성이 크겠죠. 심지어 “이혼”까지 언급하며 아내는 못마땅해 하지만 조 전 비서관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 같은 아픔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시작”이라는 문재인 전 대표의 끈질긴 설득에 정치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합니다.
김 의장이나 조 전 비서관처럼 아내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비단 정치 신인들 만의 상황 만은 아닌가 봅니다. 수도권의 한 3선 의원은 “또 한 번 아내를 설득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4년 전에도 출마를 결심하면서도 아내에게 “이렇게 (정치를) 그만 둘 수는 없지 않느냐”며 개헌 등 의미 있는 입법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어렵사리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이 의원은 이렇듯 아내나 가족들이 정치 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을 두고 “국회의원이 머 어디 가서 좋은 말을 듣습니까 칭찬을 받습니까. 그 보다는 손가락질 당하고 욕 먹는 경우가 훨씬 많죠. 그러니 가족이라고 뭐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며 “사실 예전에도 가족들이 내켜 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갈수록 그 분위기가 강한 것 같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정치에 진출해 보려는 신인들의 아내 못지 않게 여성 신인들의 남편들도 걱정 혹은 반대가 상당한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요. 본인의 뜻 못지 않게 아내의 의사도 중요하다 보니 정치권으로 영입하려는 쪽에서도 배우자를 향한 설득 작업 역시 중요해 지고 있습니다.
더민주에 입당한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의 경우도 문재인 전 대표나 당 관계자들이 설득 작업을 벌일 때 양 상무 본인은 물론 남편을 상대로 한 설득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양 전 상무는 “거듭되는 거절에도 계속되는 설득 작업에 결국 마지막으로 남편과 함께 식사를 하며 긴 시간 얘기를 나눴고 남편과 함께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양 전 상무의 남편은 아내의 입당식에도 자리를 함께 했는데요. 부부가 나란히 입당식에 함께 자리한 것도 드문 광경이었죠.
출마 여부 당선 여부를 떠나 정치에 발을 디뎌놓는 것 자체가 이리도 어렵다는 얘기죠. 그런데 말입니다. 정치 신인이나 또 한 번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이들 모두 정치를 말리는 아내나 남편을 설득할 때와 같은 그 마음가짐만 갖고 국회의원 생활을 한다면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국민들의 냉소는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치를 하기 위해 아내와 남편을 설득하는데 들이는 노력도 줄어들게 될 테니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내와 남편이 먼저 정치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설득하는 날이 오는 걸 기대해 볼 수 있겠죠. 물론 이 기대는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보는 꿈 같은 얘기라고 느낄 사람이 훨씬 더 많겠지만요.
정치인과 아내에 대한 또 하나의 스토리를 전해드립니다.
최근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난 한 인사는 김 위원장이 문재인 전 대표의 ‘끈질긴’ 구애를 결국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 이유를 전해줬습니다. 이 인사에 따르면 문 대표는 몇 달 전부터 꾸준히 김 위원장을 ‘모시기’ 위해 공을 들였고, 막판에는 며칠에 걸쳐 매일 찾아가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택으로 찾아온 문대표를 김 위원장과 아내가 함께 만났는데, 문 대표가 돌아간 후 김 위원장의 아내가 “당신하고 말하는 동안 (문 대표의) 눈을 한참 동안 자세히 봤다. 사람의 진심이 느껴지더라. 믿어도 될 것 같다”고 했다고 합니다. 최종 결심을 고민하던 김 위원장은 이 말을 듣고 문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여 더민주 선대위원장, 비대위원장을 맡기로 했다고 합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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