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 2시였습니다. ‘남자 신데렐라’임우재(48) 삼성전기 고문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녀 이부진(46) 호텔신라 사장과의 이혼소송 1심 판결에 불복, 항소장을 낸 것이지요.
온 국민의 입방아에 오를 민감한 가정사였지만, 그는 당당히(?) 항소장을 들고 법원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검은색 코트를 걸친 그의 곁에선 포토라인을 정리하는 부하 직원이나 경호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젊은 변호사 단 2명이 그를 따랐을 뿐입니다. 유명 로펌의 변호사들이 비밀리에 소장을 접수하던 그간 재벌들과는 사뭇 다른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보였던 것입니다.
“가정을 지키고 싶다”, “항소심에서는 사실관계에 입각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겠다”, “(기자들의 질문에) 재산분할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때론 표정 없이 때론 은은한 미소를 보이며 카메라 앞에 선 그의 호소는 의외로 짧았습니다. 법원에 직접 나온 만큼 장황하게 심경을 토로할 것이란 기자들의 예상을 깬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 항소한 이유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 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자들에게 남긴 뒤 5분여 만에 대기하던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 법원을 홀연히 빠져나갔습니다.
임 고문이 직접 작성했다는 A4 용지 2장 분량의 글에서는 단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애정이 진하게 묻어났습니다. “(외)할아버지, 엄마가 부자라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아들에게 제가 살았던 방식도 경험하게 하고 싶다”며 이번 항소의 이유가 아내와 그녀가 가진 돈이 아닌 오롯이 아들을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혈육과 공유하고픈 애틋한 부성애를 내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글은 보통사람인 기자의 또 다른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삼성그룹 일가의 삶을 엿볼 수 있었으니까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내용이 담겨 눈이 커졌습니다.
임 고문은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인 지난해 태어나 처음으로 라면을 먹어봤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재벌 손자라 하지만, 지난해 1인당 라면 소비량 세계 1위(연간 72.4개)인 이곳 대한민국에서? 믿기지 않았습니다. 떡볶이와 어묵, 순대도 보통사람들 누구나 먹는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아들이 그제서야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의 아들은 또래 친구들이 흔히 하는 스마트 폰 게임이나 카트 타기 등도 경험해 보지 못한 듯 했습니다. 모든 게 지난해 이혼조정 당시 주어진 월 2회의 면접교섭권을 행사하면서 아들과 단 둘이 쌓은 추억이라고 했으니까요.
“책이나 사진이 아닌 제가 살았던 방식을 조금이나마 경험하고 좀 더 바르게 자라준다면, 자신이 누리는 것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균형 잡힌 가치관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매달 두 차례 짧은 시간 아들과 함께 하며 품었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임 고문은 재벌의 양육환경이 일반인들과 매우 다르다는 것도 솔직히 털어놨습니다. 아들은 많은 수행원과 많은 인력의 보호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포함한 총수일가만을 위한 응급의료 체계도 있다고 하더군요. 글을 읽으면서 문득 드라마 ‘상속자들’이 떠올랐습니다. 허구인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재벌 2~3세의 삶이 머릿속에서 오버랩 된 것입니다. 나이든 집사와 호리호리한 경호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임 고문이 ‘가사소송법(보도금지)’ 위반이라는 이 사장 측의 반발에도 이렇게 삼성일가 내부의 은밀한 비밀을 조금이나마 공개한 것은 항소심을 유리한 국면으로 끌고 가려는 계산이 깔린 것일 수 있습니다. 1심에서 “남편의 잦은 음주와 술버릇으로 고통 받아왔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장 측을 장외에서 공격한 셈입니다. 가정 파탄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상황에 반전을 시도했다는 분석입니다. 본격적인 여론 전에 나선 것이지요.
항소심 재판부가 임 고문의 이번 전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1심 재판부가 박탈한 친권과 양육권을 임 고문이 되찾을 수 있을지, 그래서 아들과 틈틈이 ‘보통사람의 삶’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을지, 그 결과가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참고로 임 고문과 이 사장 측 법률대리인들은 임 고문의 글이나 소송과정에서 나온 양쪽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유명식기자 gij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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