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상 차리느라 고생했는데, 잠이라도 편히 자라”며 외박을 권하는 시어머니. “자고로 부부는 서로 가장 아끼고 존중해야 할 존재이니 너희끼리 먼저 세배한 후 우리에게 하라”는 시아버지. “우리는 고생했지만 너희부터는 제사 없이 그저 나를 기억해 다오”하는 부모님. “친정 가는 길이 훨씬 머니 먼저 다녀오렴”을 말하는 시댁. “고생 많으시죠. 당연히 함께 해야죠”를 연발하는 가족들.
영화 각본에나 나올 법 한 모습인가요? 이들은 모두 명절 전후 우리 가족에게 들은 ‘따뜻한 말 한마디’기사를 준비하던 중 취재한 실제 가족들의 사례입니다.(▲관련기사 “친정 먼저 다녀오렴” 명절증후군 날린 감동 한 마디)
누군가에게 고강도 노동이 요구되는 명절. 서로 “고생했다” “당연히 함께”를 논하는 일이 그리 대수로울 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배려와 격려가 많은 가정에서는 여전히 전향, 파격, 예외로 느껴졌나 봅니다. 해당 기사가 게재된 이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쏟아진 반응이 대체로 “부럽다”로 수렴된 것을 보면요.
“센스 있다” “멋지다”는 반응들 사이로는 이들 사연을 픽션과 판타지로 규정한 독자들도 적잖이 나왔습니다.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믿을 수 없어” “(내용이)모두 거짓말이든지 진짜 축복받은 사람들” “다른 나라 이야기” “현실에선 저런 시월드가 없다는 게 함정” 심지어는 “기자가 꿈을 꿨나 보다”라는 ‘웃픈’ 반응까지.
뒷이야기를 들려드리면, 사실 이런 기대(혹은 오해)와 달리 ‘명절 증후군을 날린 따뜻한 말 한마디’를 수소문하는 과정은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물론 이들의 동료, 친구, 지인들 역시 대부분 명절에 이런 말 한마디에 콧날 시큰했던 경험을 한두 조각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도 이후 “우리 가족들도 저렇게 한다” “우리 엄마랑(혹은 시어머니와) 똑같네” 등의 반응도 쇄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에게 이들 사연이 갈채를 받고 ‘선망할 동화 속 이야기’로 여겨지는 상황은 명절이라는 명분으로 모이는 많은 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 “고생했다” “애쓰셨다” “감사하다” “사랑한다”를 말하는데 얼마나 인색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명절증후군은 육체적이라기보다 정신적 질환에 가깝습니다. 고된 노동에 심리적 고통이 더해질 때 심화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 우울증 등을 다룬 ‘가족심리백과’(시공사)의 저자 송형석 박사 등은 명절 증후군의 주요 원인으로 ▦심리적 고통 ▦급격한 사회변화로 인한 문화충돌 ▦세대를 거듭할수록 제사라는 유교적 행사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정서 등을 꼽습니다.
집 안팎을 청소하고, 제수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드는 고통보다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다른 식구를 보며 쌓이는 화” “1년 내내 핵가족 문화에 둘러싸여 살다가 명절 때만 되면 맞닥뜨리는 유교 및 대가족 문화” 등이 불안, 초조, 우울, 불면을 초래한다는 겁니다. 추석과 설을 앞두고 두 차례나 팔이 마비된 33년 차 주부가 꾀병을 의심하는 가족들의 눈초리에 괴로워 모든 정밀검사를 해봤지만 결국 정신과치료를 권유 받은 사연도 소개됩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가족의 짜증, 교통체증, 경제적 부담 등으로 남성도 절반 이상이 명절 증후군을 앓는다고 합니다. 부모님 세대 역시 명절에만 의무감으로 얼굴을 비치는 자녀들, 손주들이 다녀간 후 우울증을 겪는 또 다른 명절증후군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 책이 소개하는 ‘즐거운 명절을 위한 7가지 건강수칙’은 이렇습니다. ▦명절을 맞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긍정적 사고를 하자 ▦함께 일하고 같이 쉬는 등 가사노동을 분담하자 ▦허례허식 없는 명절준비로 경제적 부담을 줄이자 ▦자주 쉬어 육체적 피로를 줄이자 ▦일할 때는 주위 사람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자 ▦고생하는 가족에게 따뜻한 격려를 건네자 ▦정신적, 신체적 증상이나 우울 감이 2주 이상 지속되면 정신과전문의를 찾자.
본의 아니게 선보인 이 ‘이색 가족 판타지’ 기사에 따른 반응 중 유독 마음에 덜컥 걸린 말이 몇 있습니다. “내게 ‘사돈 어른 기다리신다 어서 가라’하시던 어머니. 돌아가신 우리 시어머니가 보고 싶다” “본인들은 고생할 거 다 하고 이제는 며느리들 생각하는 우리 위대한 어머니들 감사합니다” “늘 반갑게 맞아주는 우리 올케 너무 고맙고 사랑합니다”.
“애쓰셨다” “감사하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가 명절을 더 명절답게 만든다는 지당한 사실을 논하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올해 설은 아무리 겸연쩍어도 이 한마디부터 챙겨가면 어떨까요. “애썼다. 사랑한다” “고생 많으셨어요. 사랑합니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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