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1643~1727)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사람이지만 230여년 간격 때문에 두 사람의 공통점을 금방 찾아내기 어렵다. 그러나 두 인물은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선인들의 성공과 실패에서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맞섰던 처칠은 “남보다 멀리 역사를 돌아보는 사람이 미래를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고 말했다. 뉴턴은 만유인력과 미적분학을 개척한 위대한 업적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 “내가 좀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뉴턴과 처칠의 명언처럼 시대와 배경은 다르더라도 어느 분야이든 과거 정책을 제대로 되새기면 현재 좌표를 읽을 수 읽고 더 나아가 미래 정책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표적인 게 일본의 아베노믹스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과거에 없던 획기적 정책을 만든 것 같지만 사실이 아니다. 80여년전 아이디어를 재탕한 것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했던 1930년대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ㆍ1854~1936) 대장상이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추진했던 저금리ㆍ양적완화 정책의 복사판에 불과하다. 다카하시 대장상이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는 바람에 정상적 마무리가 이뤄지지 않았으나, 극심한 디플레이션으로 허덕이던 일본 사회의 불황 심리를 진정시키고 경제 호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기준에서 보면 유난히 자기비하 성향이 강해서, 한국인 스스로 잘 찾아내지 못할 뿐 우리에게도 참고할 만한 과거 정책이 꽤 많다. 1950년대 세계 최빈국이던 한국이 60여년만에 이만큼 클 수 있었던 건 위기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치고 나와 앞서 있던 나라를 추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위기 극복 역사가 있고, 후대가 참고해야 할 정책이 수두룩하다.
1980년대 반도체 가격이 폭락해 미국ㆍ일본의 경쟁자가 주춤할 때 역발상 투자로 입지를 다진 삼성전자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 포드사의 조립ㆍ하청 제의를 뿌리치고 독자모델 개발을 선택했던 정주영ㆍ정세영 형제의 현대차도 마찬가지다. 수입대체ㆍ소비재 위주의 경공업 경제발전 대신 수출중시ㆍ중공업을 선택한 박정희 발전모델도 그렇다. 가까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밀어붙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결단도 여기에 속한다. 모두 당시에는 ‘잘못된 결정’, ‘정신 나간 정책’이라고 욕먹었지만 결국 성공신화가 됐다.
‘거인의 어깨’에 앉았던 뉴턴부터 시작해 박정희ㆍ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얘기한 건 세계 경제를 디플레이션 공포로 몰아가는 저유가 상황에서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흥미로운 행보 때문이다. 미 언론에 따르면 버핏은 지난해 10월부터 석유업체 주식을 사 모으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수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필립스66’이라는 석유업체 지분을 지난달에만 8억3,200만달러(약 1조원)나 사들였다.
‘가치 투자’와 ‘장기 투자’를 원칙으로 삼는 버핏이 석유 업체에 투자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의 판단이 언제나 정확한 건 아니지만, 저유가 상황이 바닥을 찍고 돌아설 날이 머지않은 건 아닐까.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던 2년 전 만난 석유 전문가들은 ‘고유가의 가장 확실한 대책은 고유가’라고 말했다. 산유국이 생산량을 늘리고, 소비국은 허리띠 졸라매는 상황이 이어져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면 저절로 고유가 시대가 끝난다는 것이다. 믿기 어려웠지만 2년 만에 상황은 급반전됐다. 이는 ‘저유가의 확실한 대책은 저유가’라는 전망도 가능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 이후 한국에서 ‘해외자원개발’은 금기어가 됐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산유국 콧대가 꺾였고, 가격도 4분의 1이 됐다. 박정희, 노무현, 이병철, 정주영 등이라면 ‘지금 뭐하고 있는냐’며 측근과 부하들을 독려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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