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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때부터 “물 좋다” 소문.. 민족목욕탕 부흥 꿈꾸는 동래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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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때부터 “물 좋다” 소문.. 민족목욕탕 부흥 꿈꾸는 동래온천

입력
2016.02.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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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귀족 즐겨 찾았던 대표 휴양지

금정산 기슭에 20여곳 옹기종기

일제 땐 부호들 별장 즐비

부산의 스팟 변하며 상권 침체

주민들 “옛 명성 되찾자” 합심

시설정비에 볼거리, 먹거리 강화

“2018년엔 온천 대축제 열 것”

지난달 28일 오후 부산 동래구 온천장 거리 모습. 부산=전혜원기자
지난달 28일 오후 부산 동래구 온천장 거리 모습. 부산=전혜원기자

‘우리 민족의 목욕탕’ 부산 동래온천이 화려한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국내에 수많은 온천이 있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동래온천이 으뜸이다. 동래온천은 이미 신라의 대표적 관광지였다. ‘삼국유사’는 신문왕 시절 재상 충원공이 다녀갔다고 기록했고, ‘중동국여지승람’은 신라의 왕들이 여러 번 이곳에 왔다고 썼다. 예부터 왕이나 재상이 찾는 휴양지로, 이곳에서 목욕하며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욕탕을 세웠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이유로 이규보로부터 ‘땅이 외졌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권신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목욕을 마친 후 정갈한 마음으로 여러 시를 남기기도 했다. 고려 말 문신으로 지조와 청렴으로 유명했던 박효수는 “목욕을 마치고 침상에 누우니 상쾌한 기분은 심신을 바꿔놓은 것 같고, 학을 타고 넓은 허공을 너울너울 나는 것 같구나”라고 동래온천을 찬양했다.

부산 동래구 금정산 기슭에 위치한 동래온천은 농심호텔을 중심으로 녹천탕, 금천탕, 반도온천, 벽초온천, 약수온천, 천일탕, 금정탕 등 업소 20여 곳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래서 부산 사람들은 이 일대를 온천장(溫泉場)이라고 부른다. 크고 작은 온천이 시장처럼 밀집해 얻은 이름이다.

최저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진 2일 한 온천탕을 들어서자 뜨거운 김이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제법 널찍한 탕에는 서너 명의 어르신들이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한창 온기를 즐기고 있었다. 매일 온천을 즐긴다는 이국열(73)씨는 “원래 관절염이 심해 잘 걷지 못했는데 동래온천에서 매일같이 목욕을 하다 보니 많이 좋아졌다”면서 “이보다 좋은 약이 없다”고 엄지를 추켜세웠다. 옆에 있던 박인용(69)씨도 “여기서 목욕하고 나면 피부가 보들보들해진다”며 “유명하다는 전국 목욕탕들을 많이 다녀봤지만 동래온천만한 곳이 없다”고 거들었다.

동래온천은 부산의 진산 격인 금정산 자락에서 흘러 나온다. 염소성분과 마그네슘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염천(食鹽泉)으로 만성 류머티즘과 관절염, 신경통, 말초 혈액순환 장애, 요통, 근육통, 외상 후유증, 피부병, 고혈압, 빈혈, 소화기 질환 등 각종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수온도 섭씨 50도를 넘어 업소에서는 온천욕이 가능하도록 식혀서 욕장에 공급하고 있다.

온천의 효능과 관련된 전설도 여럿 전한다. 대표적인 것이 절룩거리는 학이 땅속에서 솟은 따뜻한 샘터에서 멀쩡해지는 것을 본 한 노파가 아픈 다리를 고쳤다는 ‘백학 전설’과 눈 내리던 겨울 사슴이 밤마다 잠자고 가는 것이 신기해 그곳에 가보니 사방은 눈으로 덮였는데 새싹이 자라고 웅덩이에서 뜨거운 물이 솟고 있었다는 ‘백록 전설’이다.

1960년대 온천장 입구 모습. 동래구 제공
1960년대 온천장 입구 모습. 동래구 제공

온천장이 오늘과 같이 관광지로 개발된 것은 1900년대 초 식염 온천욕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부터다. 부산포 개항과 함께 꾸준히 동래온천 출입을 요구하던 일본은 국력이 약해진 조선 후기부터 온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과 함께 본격 온천 휴양지로 개발해 그들의 이권지역으로 만들었다.

온천장은 뒤로는 금정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동래천(온천천)이 흐르는 천혜의 자연자원을 갖춘 곳이다 보니 풍광에 반한 일본인 부호들이 앞다투어 별장을 지었다. 여관과 요정 등도 줄을 이었다. 당시 여관은 목욕과 숙박, 요리점을 겸한 복합기능 휴식처로 소규모 동물원과 연못 등을 갖춘 여관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동래온천을 즐기기 위해 1908년부터 부산 도심에서 온천장 입구까지 경편철도(증기기관차)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침탈로 동래온천이 그들의 전유물로 변한 가운데 조선인들이 경영하는 소규모 여관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옛 동래부 교방 출신 권번 예기와 일본기생까지 가세하면서 각국 외교 사절단이나 일본 고관대작이 조선을 방문하면 으레 이곳에서 쉬어 갔다. 작은 고을 온천장은 20여년 만에 조선 최고 유흥지로 부상했다.

30여년 동안 이 일대의 옛 모습 사진과 생활자료를 수집해온 동래구청 문화공보과 이상길 주무관은 “당시 동래지역 13개 학교 운영비가 총 10만원이었는데 온천장 한 여관의 1년 수입금이 100만원이었다”면서 “이것만 봐도 온천장 여관들이 얼마나 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30년대 온천장 거리 모습. 동래구 제공
1930년대 온천장 거리 모습. 동래구 제공

성행하던 온천장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주춤하게 되지만 1965년 금강공원 조성 이후 다시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1960, 70년대에는 전국 최고의 신혼 여행지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인근 부산대 주변으로 젊은층 문화 거리가 형성되고, 연산동이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온천장 상권은 다시 침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온천장 일대의 극심한 교통 혼잡으로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꺼려했다. 목욕탕 정비도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못해 더 이상 관광객들을 불러들이지 못했다. 고급 요정이었던 ‘동래별장’도 1980년대 이후 휴ㆍ폐업을 반복하면서 명맥을 이어 왔으나 온천장 상권이 기울면서 1997년 끝내 문을 닫았다.

하지만 제2의 온천장 시대를 열겠다는 지역주민들의 마음은 뜨거운 온천수처럼 쉽게 식지 않았다. 동래구와 주민들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진입로를 넓히고 관광객을 위해 노천 족탕도 만들었다. 온천수가 흐르는 도심 실개천을 조성하고, 간판도 새롭게 바꿨다. 일방통행로가 많은 이곳에 우회도로를 만드는 등 도시계획도 재정비했다. 지지부진했던 금강공원 드림랜드 조성사업도 산림청과의 토지교환이 협의되면서 속도가 붙었다. 또 지난해 온천시장에 대한 정비사업이 인가돼 주상복합형 전통시장으로 거듭나게 됐다.

지난해 21회를 맞은 ‘동래읍성역사축제’는 동래지역만의 역사와 전통을 차별화한 창의적 체험 프로그램이다. 연인원 37만명의 국내외 관광객 유치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한 점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하는 ‘문화관광 유망축제’에 3년 연속 선정돼 동래온천 부활에 힘을 보태고 있다. 온천 업소들의 움직임도 적극적이다. 금천파크온천을 운영하는 김성국 한국온천협회 부회장은 ‘2018년 대한민국 온천대축제’를 동래온천에서 열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전광우 동래구청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동래파전 외에도 갈비, 칼국수, 먹장어(꼼장어) 등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 등 관광객들이 온천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보강해 온천장의 부흥기를 열겠다”고 말했다.

부산=전혜원기자 iamjh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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