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한 동생이 필리핀 경찰서에 갇혀있다는 연락을 받고 돈을 보냈는데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에 당한 것 같아요.”
문모(30)씨가 보이스피싱에 속아 2,500만원을 입금했다며 경찰에 신고한 것은 지난해 9월이었다. 문씨는 필리핀에 여행을 간 지인 김모(29)씨로부터 “여자를 만났다가 잘못돼 (현지) 경찰서에 와 있고 해결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다급한 문자를 받고 김씨가 알려준 계좌로 바로 돈을 보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김씨는 필리핀 경찰서에 갇힌 적이 없었고, 이들은 피해 사실을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문씨는 금융당국이 보이스피싱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지급정지와 지연인출제도를 활용해 돈이 필리핀에서 출금되는 걸 막았다. 금융감독원에 환급을 신청해 피해액도 돌려받았다.
피해자들이 돈을 되찾아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던 사건은 경찰이 조사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경찰은 직업이 일정치 않은 문씨가 짧은 시간에 큰 돈을 입금한 점, 김씨가 현지에서 잃어버렸다는 휴대폰이 우연히 보이스피싱 일당에 의해 사용된 점 등을 수상히 여기고 자작극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경찰의 직감은 적중했다. 홀로 필리핀에 갔다는 김씨는 한모(38)씨 등 일당 3명과 함께 출국했고, 김씨가 한국에 있는 문씨에게 가짜 보이스피싱 문자를 보내는 동안 필리핀에 있던 한씨 등은 현지 불법 환전소에서 이미 돈을 현지 화폐로 받아 챙긴 상태였다. 이들은 환전소 두 곳을 속여 총 4,500만원을 가로챘다. 문씨의 신고로 계좌 지급이 정지된데다 불법 환전소인 탓에 환전상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사기 및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총책 한씨를 구속하고 나머지 5명은 불구속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3일 밝혔다. 환전상들은 불이익을 당할까 봐 금감원에 이의신청도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관계자는 “사기범들은 해외 출국 시 다른 항공편 및 좌석을 이용하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며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겠다며 마련한 제도를 악용한 신종 사기수법”이라고 말했다.
최근 보이스피싱 피해구제 제도를 악용해 허위신청하는 사례가 늘면서 금감원도 이에 강력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금감원은 시중 은행 6곳에 지난해 10월 중 피해구제신청으로 지급정지된 계좌 2,181건 중 466건(21.3%)이 허위 신청인 것으로 추정하면서 “피해구제를 전화로 신청한 후 일정 기간 내에 서면신청서를 접수하지 않으면 지급정지를 종료하고 허위신청자는 적극 형사고발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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