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짝사랑이 한 사람을 혼자서 좋아하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결과 없이 허망하게 사라져버린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짝사랑은 ‘너는 누구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이지만 그것은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렇다면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잘못된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소요되는 혼란이 이 적요로운 사랑 앞에선 어느덧 무의미해진다.”
‘스타일’의 작가 백영옥씨가 4년 만에 신작 장편 ‘애인의 애인에게’(예담)를 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젊은 여성들의 삶을 가까이서 포착해온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 뉴욕 예술계를 무대로 엇갈린 연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진작가로서 성공을 꿈꾸는 야심만만한 청년 성주와 그를 사랑한 세 명의 여인의 내밀한 사연이 쓸쓸하고 투명한 문체로 펼쳐진다.
뉴욕에서 성공한 큐레이터로 살다가 한국에서 온 젊은 사진작가에 끌려 결혼하지만 이내 그의 외도를 의심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마리, 짝사랑하는 남자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그가 한 달 간 세를 놓은 집에 들어가지만 오히려 남자의 아내에게 연민을 갖는 정인, 불행한 결혼생활 속에 새롭게 다가온 사랑의 전조에 흔들리는 수영. 그리고 이 세 명의 여자를 하나로 연결하는 공통분모이자 모든 갈등의 진원지인 남자 조성주.
소설의 발단은 정인의 이야기로 이뤄진 짧은 단편이다. 작가가 문장 웹진에 소설 ‘헬로 스트레인저(hello stranger)’를 발표하자 독자들은 정인이 짝사랑했던 남자와 그의 애인이 궁금하다는 반응을 보내왔고, 감춰진 인물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면서 한 권의 장편소설이 완성됐다.
사랑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지만 소설엔 질투나 애욕, 원한의 끈끈함은 없다. 성주와 그의 아내 마리가 이별여행을 간 사이 그의 집에 들어간 정인은 텅 빈 집에서 어긋나버린 사랑의 폐허를 보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는 마리가 뜨다 만 성주의 스웨터를 발견하고 그것을 풀어 다시 새로운 뜨개질을 시작한다. 조성주가 아닌 마리와 수영을 위한 선물이다.
사랑의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면을 말하기 위해 짝사랑의 숭고함과 “적요로움”을 확대 조명하는 작가의 모습에선 사랑에 치여 지칠 대로 지친 여성이 겹쳐진다. 명성과 지위, 매력의 발산으로 포획된 사랑의 민낯은 어떤 표정으로 퇴색하고 스러져갈까.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고통까지 소유하려는 건 아닐까. 간절히 사랑을 원하면서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오히려 타인의 삶을 소유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자신의 실체를 마주하지 못하고 타인의 존재에 의지하려는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지금 여기’의 사랑을 보여준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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