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손편지를 썼다. 손가락 끝으로 또각또각 자판을 두드려 성마르게 적으면 그 발랄하고 경쾌한 터치 음 만큼 재빠르게 진심이 휘발될 것 같아서. 그렇게 적힌 말들의 무사안일과 동어반복이 본래 뜻을 왜곡할 것 같아서. 연필을 깎고 백지를 펼쳤다. 선뜻, 하고자 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쓰기 전엔 분명했던 말이 백지를 마주치자 돌연 고개를 돌리며 스스로 본심을 가리는 느낌. 하얀 공백을 계속 주시했다. 문득 모든 진심이란 게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연필을 꽉 쥐고 첫 단어를 써본다. 뻑뻑하던 필기감이 조금씩 유연해지면서 천천히 단어와 문장들이 형성된다. 너무 하얘 외려 막막한 어둠처럼 여겨지던 백지에 서서히 빛이 드는 것 같다. 어두운 폐광 속 사금을 캐내는 광부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말들이 이어지고, 잘 표현하지 못해 혼자 애달파했던 말들이 윤곽을 갖춰간다. 글이 나아갈수록 연필 쥔 손에 피가 돌면서 마음에 맺혔던 응혈도 살짝 내려앉는 느낌.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편지를 읽어본다. 다 썼으되, 아직 부치고 싶진 않다. 글씨를 손으로 살살 문질러본다. 검은 때가 손끝에 묻어 지문이 돌연 선명해진다. 종이에도 흐리게 얼룩이 남았다. 진짜 전하고 싶은 말은 이 흔적들 아니었을까. 말보다 흐리지만, 말보다 선연한 육체의 흔적. 그것들의 호응 아니었을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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