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수식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영화제의 꽃’ ‘섹시한 자태’ ‘일품 연기력’처럼 칭찬을 위해 동원되는 미사여구들이 그 앞에선 무력하기만 하다.
배우 김혜수(46)의 이름 앞에는 오래 전부터 여러 수식이 불필요하다. 30년 가량의 연기 이력도, 이름이 지닌 무게도, 여배우로서는 흔치 않다. 그는 세월과 보폭을 맞추며 점점 성장해가는 대부분의 배우들과 다르다. 어느 순간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스타가 된 뒤 자신이 지닌 매력을 주체할 수 없어 한 올 한 올 풀어헤치고 있다. 제 아무리 휘황찬란한 치장도 김혜수란 이름 앞에선 초라해질 수 밖에. 1986년 데뷔 이래 그는 ‘나는 김혜수일 뿐’ 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며 30년 인기를 지켜왔다.
형사 차수현도 다르지 않다. 지난 1월 첫 방송된 tvN 금토드라마 ‘시그널’에서 김혜수는 장기 미제사건 전담팀을 이끄는 15년차 베테랑 형사로 변신했다. 험하디 험한 사건현장에서 키운 맷집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인 용의자를 제압하는 카리스마로 무장했다. 충무로와 지상파 안방극장을 오래도록 장악해 온 김혜수 본인의 모습을 닮았다.
대충 빗어 넘긴 짧은 머리와 가죽점퍼 등 차수현이 형사임을 설명하는 전형적인 아이템이다. 식상할 수 밖에 없는 외모를 김혜수는 30년 연기 내공으로 극복한다. 공소시효 만료를 하루도 채 남기지 않은 아동 유괴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압박하는 장면은 특히 압권이다. “아주 적은 혈액이라도 묻어있다면 100년이 지나도 DNA 검출은 가능해. 현대과학이 피해자에게 준 선물이지”라는 대사는 김혜수의 차분한 얼굴과 냉정한 성대를 통해 생기를 얻는다.
“남자 혼자 있는 데를 왜 들어갔냐”며 자신을 나무라는 동료 형사에게 던지는 한마디도 김혜수답다. “남자 여자 가릴 거면 수갑 놔야지”라는 일침은 “나는 여배우가 아니라 배우 김혜수일 뿐”이라고 남성중심 연예계에 항변하는 것처럼 들린다.
최근 ‘시그널’ 제작발표회에서 케이블TV로의 진출 이유를 밝히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지상파TV가 안전하다는 생각들이 여전하다. 나는 내 선택을 믿고 내가 얼마나 제대로 준비하느냐가 전부다. 결과가 좋으면 보너스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한 자리 수 시청률에 여전히 몸을 사리는 배우들을 향한 일침처럼 들린다. KBS 드라마 ‘직장의 신’(2013) 출연 당시 “시청자들의 반응에 우쭐해 하지도 의기소침해 하지도 않는다. 반응이 안 좋다고 기가 꺾이면 안 되는 게 우리 직업”이라던 당당한 모습과 다르지 않다.
분명 옆집 언니나 우리 회사에도 있을 법한 친근한 이미지는 아니다. 정감 가는 생활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고 예사롭지 않은 캐릭터를 소화해낸 연기 역정 때문일 것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로 극과 극의 감정을 표출하는 지수(영화 ‘얼굴 없는 미녀’)부터 노름판을 지배하는 타짜들을 조종하는 정 마담(영화 ‘타짜’), 카지노에 숨겨진 희대의 다이아몬드를 찾으려는 전설의 금고 털이 펩시(영화 ‘도둑들’), 냉혹한 뒷골목에서 ‘조직’을 운영하는 냉철한 보스 엄마(영화 ‘차이나타운’)까지. 장르는 다종다양하고 역할은 제 각각이면서도 도발적이고 개성 강한 인물들이었다.
매년 여러 시상식에서 선보이는 과감한 의상도 김혜수만의 특권이 된지 오래다. “나를 표현하는 일을 하면서 내 마음대로 옷 하나 못 입을 필요 없다. 누구나 취향이 있고 각자의 방식이 있는 것 뿐”이라는 김혜수의 일갈에 쉽게 토를 달기는 힘들다. 소모적인 ‘노출 논란’에서 김혜수가 자유로운 이유다. ‘시상식의 꽃’이라 불리며 남자 MC의 오른쪽에 서서 예쁜 드레스를 나풀대기 바쁜 여느 여자 MC의 모습과도 분명 다르다. 수 많은 여배우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22년째 청룡영화제를 이끈 원동력이다.
이토록 화려하고 강렬한 배우가 또 있을까.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짙고, 튀는 배우일수록 열성 팬이 많으면서 고개 젓는 대중도 많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혜수는 남녀노소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브라운관에서 보여준 소탈한 모습이 보편적인 사랑을 끌어내는데 한 몫 하고 있다. 김혜수는 지난해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선배 배우 김용건과 도시락을 먹으며 “김용건 선배님이 회식 때 숟가락에 고기를 올려주신 걸 잊지 못한다”고 귀여운 고백을 하더니 SBS ‘식사하셨어요?’ 에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 어르신의 “이 아줌마야” 발언도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판에 박힌 말로라도 굳이 김혜수를 수식해야 한다면 ‘대체 불가’란 말이 적당할 듯 하다. ‘차이나타운’의 한준희 감독이 밝힌 캐스팅 이유는 배우 김혜수에 가장 적합한 평가다. “프레임에 등장하는 순간 모두가 동의하는 여자여야 했다. 김혜수라는 배우 외에는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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