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앞잡이, 김종인은 물러가라”(광주 국립 5ㆍ18 민주묘역)
“김종인의 힘,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경남 김해 봉하마을)
1월 31일, 하루 동안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에게 쏟아진 상반된 반응입니다. 김 위원장이 비대위와 선대위를 이끌고 첫 번째 외부일정으로 광주와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연달아 찾은 이날, 더민주의 새 지도부는 한 편에선 냉대를 받았고 다른 한 편에선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성에 모처럼 미소 지었습니다.
이날 광주 운정동 국립 5ㆍ18민주묘지는 아침부터 소란스러웠습니다. ‘5ㆍ18 정신실천연합’ 소속이라고 밝힌 노인 20여명이 추모탑 앞에서 김 위원장이 참배를 한다는 소식에 이를 막으려 일찍부터 대기 중이었죠. ‘김종인은 물러가라’등이 적힌 손 팻말을 들고 기다리던 이들은 김 위원장이 나타나자마자 “김종인이 광주 오려면 전두환에게 받은 훈장 반납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고 하늘이 통곡할 일입니다”라 울부짖었습니다. 1980년 12ㆍ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로 정계에 입문한 김 위원장의 경력이 문제가 된 겁니다.
이에 김 위원장과 함께 참배에 나섰던 5ㆍ18 기념재단 및 유족회에서 “5ㆍ18을 역사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맞서 몸싸움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민주화 열사들이 잠든 묘역을 뒤로하고 서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하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추모하는 노래인‘임을 위한 행진곡’을 갑자기 부르는 등 한바탕 난장판을 벌였죠. 김 위원장을 비롯한 이종걸 원내대표 등 더민주 의원들은 추모탑 근처도 가지 못한 채 굳은 얼굴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20분 간의 실랑이 끝에 소란이 잦아들고 겨우 참배를 하고 묘역을 돌아보던 김 위원장은 한 묘지 앞에 멈춰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습니다.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배경이 되기도 한 윤상원ㆍ박기순 열사의 묘였습니다. 한참 무릎을 꿇고 그 앞에 머무르던 김 위원장은 “광주에 와 보니 사죄해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고 거듭 사과했습니다. 갑작스런 김 위원장의 행동에 기자들은 물론 의원들까지 모두 놀랐습니다. 평소 ‘독불장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고집을 쉽게 꺾지 않는 성격의 그였기 때문인데요, 전날인 30일 광주를 찾은 김 위원장이 가장 먼저 한 일도 5ㆍ18 유족회 등 관련 단체를 만나 자신의 국보위 이력을 사과하는 것이었다 합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김 위원장은 광주를 떠나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로 향했습니다. 역시나 100여명의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죠. 이들은 김 위원장이 나타나자마자 박수와 함께 ‘김종인’과 ‘박영선’등 더민주 지도부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영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와 악수를 하려는 인파에 떠밀려 김 위원장의 발길이 잠시 늦춰질 정도였습니다. ‘사람의 힘, 김종인의 힘’ ‘깨어있는 김종인과 더불어민주당의 조직된 힘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입니다’라는 손 팻말도 등장했습니다. 부산과 김해, 광주 등 각자에서 온 시민이라고 밝힌 이들은 “김종인 비대위원장을 응원하기 위해 왔다”고 전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참배를 마치고 너럭바위 기념비까지 둘러 본 김 위원장은 방명록에 “더불어 잘 사는,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적었습니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를 예방하기 위해 사저로 이동하던 더민주 새 지도부 일행은 다시 한번 인파에 둘러싸였습니다. 이 같은 지지와 환대에 김 위원장은 사저로 향하다 갑자기 몸을 돌려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답하기도 했습니다. 지방일정 내내 딱딱하게 굳어 있던 김 위원장의 얼굴이 처음으로 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또 종편 프로그램의 패널로 얼굴이 알려진 이철희 선대위원은 쏟아지는 사진촬영 부탁에 가장 늦게 사저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이 위원은 이어진 예방에서도 권 여사가 “텔레비전에서 봐서 그런지 자주 본 사람 같다”며 “서울에 가면 밥을 한 번 사고 싶다”고 말하는 등 유명세(?)를 톡톡히 누렸습니다. 권 여사는 이날 김 위원장 일행에게 일일이 덕담을 건네며 “최선을 다해서 한 번 해봅시다. 뭔가가 보이는 것 같다”라고 격려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광주에서는 냉대를, 반대로 봉하마을에서 든든히 기를 받은 김 위원장을 비롯한 더민주 지도부지만 이들의 면면은 사실 ‘친노무현(친노)’와는 거리가 멉니다. 김 위원장은 국회의원 시절 4선 고지를 밟던 2004년 열린우리당과 충돌하던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로 영입되며 친노와 반대 진영에 선 바 있습니다. 평소 김 위원장은 친노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밝혀왔죠. 이철희 위원 역시 종편 프로그램에서의 촌철살인 멘트로 친노 지지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이들이 친노세력의 성지나 다름없는 봉하마을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환영을 받은 겁니다. 한 참석자는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습니다.
비록 환영을 받진 못했지만 더민주 지도부는 총선 때까지 몇 차례 더 광주를 찾을 계획이라고 합니다. 최근 더민주는 광주에서 안철수 의원이 주축이 된 ‘국민의당’에 지지율이 밀리며 안방을 내줬죠. 탈당을 시사했던 박혜자 의원이 당 잔류를 발표하는 등 약간의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나, 광주 현역의원 8명 중 6명이 국민의당과 함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때문에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의 ‘안풍(安風)’의 진원지가 된 광주의 민심 되돌리기가 무엇보다 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 관계자는 “언젠가는 광주에서도 봉하마을에서 받은 환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더민주는 과연 ‘빼앗긴 고향’광주 탈환작전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김종인체제’ 더민주의 총선전략과 더불어 또 하나 관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광주ㆍ김해=전혼잎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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