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일)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경제관계 장관들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발표했습니다. 교육 부총리,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고용노동부 장관, 금융위원장 등이 연명한 호소문이었습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여러 가지 내용이 있었지만 핵심 내용은 “국회에 계류된 구조개혁 관련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는 것과 “교육감들은 조속히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동개혁에 관한 옹호,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상황 설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대통령이나 관계부처가 하던 주장과 별로 다른 말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구조개혁의 성패는 입법에 달려 있다”거나, “노동개혁 4법이 청년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주장은 사실 그 동안 여러 번 반복된 얘기였습니다. 대화 상대방에게 역제안을 하거나 수정 제안을 한 것도 없이, 그저 기존의 입장만 재확인한 호소문 발표였습니다.
문제의 책임을 남 탓으로 돌리려는 정부의 상황 인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듣기에 따라선 상당히 원색적인 비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일부 지자체는 청년수당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곳간을 헐어 쓰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며 서울시와 성남시를 정면 겨냥했고, “한노총의 노사정 대타협 파기 선언으로 구조개혁의 공든 탑이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다”고 노동계로 화살을 돌렸습니다. 누리과정 예산 편성이 어렵다는 교육감들에게는 “내 돈이라면, 내 집 살림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라며 질타했습니다. 내용은 바뀐 게 없고, 비난의 수위만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이날 유 부총리와 장관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이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정부의 협상 파트너들입니다. 지방정부, 노동계, 시도교육감과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일이 안 되는 책임을 다 상대방에게만 돌려버린 거죠. 정부가 국민을 직접 상대로 한 호소문 형식을 빌어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책임만 강조하는 감정적인 대응을 한다면, 앞으로의 협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다른 데 가서 협상 파트너를 비난하고 있는데, 협상 상대방이 보기엔 협상하지 말자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 구조개혁 공든 탑이 흔들리는 상황이 노동계의 잘못만은 아닌데, 한노총 입장에선 저런 식으로 매도당하는 것은 상당히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겠습니다.
사실 이 호소문 발표는 원래 일정엔 없었고 그 전날 갑자기 잡혔는데, 이렇게 긁어 부스럼만 날 얘기만 할 거라면 굳이 왜 갑자기 이런 호소문을 발표하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절박했다고 이해해 보려 해도 그나마 이준식 부총리(교육부장관)와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다른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않고 차관을 대신 보낸 걸 보면, 호소문에 나온 얘기들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나 봅니다.
마지막엔 결국 화룡점정까지 찍었습니다. 부총리와 장ㆍ차관들이 일방적으로 호소문만 낭독해 놓고 질문은 받지 않고 그냥 가 버린 겁니다. 유 부총리가 호소문을 발표한 뒤 일부 기자들이 질문을 요청했는데, 그는 기자들이 “질문 받고 가세요”라고 소리를 쳤음에도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그냥 발표장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내용도, 형식도, 마무리도 모두 일방적이었던 호소문 발표가 돼 버린 겁니다.
정부가 호소문에서 담은 주제들은 모두 협상의 상대방이 있고 상대방 나름의 논리가 존재하는 사안입니다. 노동계, 지방정부, 지방교육감은 그저 그런 상대가 아니라 모두 법적ㆍ제도적 권한을 갖춘 파트너들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들을 설득하고 타협하고 조정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상대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협상장 밖에서 이렇게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수준이 높지 않은 대응 방식입니다. 사회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논란 사안에서 종종 반복되었던 정부의 성급함이나 독선적 태도가 이번 호소문 발표 과정에서 고스란히 나타난 것 같아서 뒷맛이 씁쓸합니다.
이영창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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