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에서 벨리즈(멕시코, 과테말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카리브해 독립국가)로 넘어가는 교통수단으로, 우린 수상 택시를 택했다. 왜? 색다르니까. 평범한 게 죄가 되는 이 시대에, 평범해지고 싶지 않은 우리의 이동이 이런 큰 화를 낳게 될 줄은 몰랐다. (탕탕 빼고) 난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

멕시코에서 5개월여 여행을 마치고 벨리즈로 넘어가려던 시점이었다. 멕시코 휴양지인 플라야 델 카르멘에서 툴룸으로 가는 8차선 도로에서 발견한 전광판이 시선을 사로 잡았다.
‘멕시코 체투말에서 벨리즈 산 페드로까지, 논스톱! 쉽고 무진장 빨라요!’
'쉽고 빠르다'라는 카피가 '어렵고 느린' 중남미 여행자의 맘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카리브해를 관통하며 쏜살같이 달리는 국경 택시라니! 간만에 현대 문명의 노예가 된 기분에 황홀했다. 광고에 질질 끌려 우린 출발 터미널이 있는 체투말로 향했다.



한국인인 난, 중미 국가 중 유일하게 벨리즈에서 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광활한 인터넷 세계 어디에서도 육로가 아닌 카리브해 경로의 비자 받는 법을 찾을 길이 없었다. 남은 대처는 한 가지. 최선을 다해 현지인들에게 물었다. 모두 국경에서 받을 수 있노라 확답했다. 벨리즈에서 정한 첫 행선지는 키코커(Caye Caulker). 일단 입국 심사를 받을 수 있는 국경, 산 페드로로 진입한 뒤 당일 키코커행 보트로 갈아타려고 했다. 그런데 국경에서 발목이 잡혔다.
“여기에선 비자 못 만들어. 다시 체투말로 돌아가 비자 받고 건너와. 오고 싶으면.”
입국 심사하는 ‘빅마마’의 베이스 톤 목소리, 가슴팍을 후벼 파는 ‘오고 싶으면’이라니. 조국에 대한 애정이 철철 넘쳤다. 원하는 돈이 있으면 내겠다는 부패 책략도 통하지 않았다(중남미에선 놀라운 일이다). 입국 승인도 못 받았는데 옆에선 세관 신고서를 내라고 닦달이다. 내 뒤에 선 커플의 골든 리트리버는 100달러를 내지 않으면 입국 금지라고 했다. 난 개보다 못한 운명이었다.

혼절에 가까운 상태가 된 사이, 입국 심사하던 빅마마는 나의 여권을 빼앗은 채 사라졌다. "어디에서 비자 받으면 되는데?" "내 여권은 어떻게 찾는데?"란 질문은 이미 제트 익스프레스 수상 택시 에이전시에 가 있다. 그들은 종이 쪼가리에 산타 엘레나 국경에 가야 한다고 적었다. 2시간 만에 받을 수 있고 60달러란다. 하루 만에 다시 입국(사실 난 무입국 상황)할 수 있을 거라며, 리턴 티켓을 끊으라 했다. 무슨 생명수 마냥 그 종이 쪼가리를 꼬옥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빅마마는 필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저녁 식사를 하러 간 게 분명했다. 불법 체류자 따윈 그녀의 식사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겠지. 그날 난 가장 잘못된 밤을 보냈다.


불법 체류자의 멕시코 귀환 프로젝트는 오전 일찍 시작되었다. 체투말행 보트가 출발하기 1시간 반 전, 조급함이 날 터미널에 데려다 놓았다. 여권을 앗아간 빅마마는 보트 출발 30분 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보다 더 육중한 몸매, 더 짙은 화장, 더 검은 복장이었다. 웃으며 여권을 내어주고 다른 여행자와 같은 절차를 따르게 했다. 불법 체류자에게 사뭇 관용을 베푸는 태도인데(수갑이라도 채울 줄 알았다) 문제는 ‘다른 여행자와 같은’ 출국세(Departure&Pact Fees)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 내 여권엔 멕시코 출국 이후 어떤 스탬프도 찍히지 않았음에도, 빅마마는 19달러 출국세를 요구했다. 게다가 자연보호 세금 3달러까지 물었다. 내가 자연을 훼손한 일이라면 화장실을 간 것뿐이었는데… 칼 없는 날강도가 아닌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입국의 출국세가 여기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상택시의 '쉽고 빠르다'란 카피에 '싸다'란 문구는 없었다.

실랑이로 보트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출발 시각이 임박해 빅마마가 나타난 것도 수작이었나 보다. 탕탕 없이 떠나는 수상 택시는 유난히 출발을 지체했다. 카리브해 위에서 모든 잡생각(대부분 부정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급기야 현실이 되었다. 앗, 멕시코는 벨리즈보다 1시간이 느리잖아! 고로 당일 체투말에서 산 페드로로 돌아가는 오후 3시 배편을 타야 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3시간.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가 바로 나였다. 창 밖 풍경은 징글징글하게 아름다웠다. 애먼 카리브해가 미웠다.

미션이 시작됐다. 체투말에 정박해 보안용 개가 배낭 속 마약과 총기 검사를 하자마자 여권 체크를 위해 전력 질주했다. 그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신은 모두 찾았다. 사이비 기도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고작 3시간 체류할 건데, 멕시코의 출·입국세 만큼은 내지 않게 해주세요.’ 50달러나 되는 그 돈을 뱉어내기엔 지갑도 얇았고, 온당한 것도 아니었다. 1등으로 입국심사대에 섰고, 격앙된 어조로 내 생애 가장 현란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워워. 이봐, 진정해. 내 말 좀 들어봐. 오늘 다시 벨리즈로 떠나면 출입국세 낼 필요 없어."
시작이 좋다. 비자 발급 장소가 산타 엘레나가 아닌 것 같다는 국경 관계자의 말을 허투루 들으며 급한 마음에 터미널을 뛰쳐나가려 했다. 산 페드로에서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던 ‘모두’ 중 하나가 그들이 아니었던가. 이 엉망진창인 시나리오에 그들도 유죄였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 영화의 클리셰처럼 진정한 구세주가 등장했다. 그녀의 이름, 루.피.타.
“어이, 코리안 걸.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어???”

루피타는 전날 멕시코를 떠나기 전 연을 맺은 체투말 아피쿠루 국제터미널 소속 공무원이다. 여행을 혐오하는 그녀에게 거의 여행 전도사처럼 인상을 남긴 우리였다. 속성으로 사정을 들은 그녀는 단박에 명확한 비자 발급처를 알아냈다. 산타 엘레나 국경이 아닌 벨리즈 영사관(consulado de Belize)이란다. 그녀가 주선한 택시로 달렸다. 택시는 날 유괴할 생각이 아닌가 할 정도의 외딴 거리로 진입했고, 어느 폐창고 앞에 멈췄다. 진정 이것이 그 '비싼' 비자를 발급하는 곳이란 말인가.



무너질까 종종걸음을 한 그곳. 비자 발급 비용은 900페소란다. 달러로 내면 안되느냐고 하니, 멕시칸 페소로 내란다. 담당자는 이례적으로 영어를 못해(벨리즈는 미국 달러를 사용하는 동시에 영어와 스페인어 공용 국가다) 의혹은 더 짙어갔다. 다시 택시를 타고 근처 ATM기에서 돈을 찾아 발급비를 냈다. 그 시각이 11시 30분이었는데 밀린 비자 업무가 많아 오후 2시에 발급할 수 있단다. 나쁘지 않은 시각이다. 택시비를 한번 더 내야 했지만, 오늘의 나에게 돈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오히려 이런 빠른 발급 서비스에 삼배라도 할 심산이었다.

불안한 기다림은 터미널로 돌아와 루피타와의 수다로 승화했다. 오후 1시가 가까워질 즈음, 정치문제로까지 소재가 번져가던 수다를 그녀가 싹둑 끊었다. 차 키를 짤랑 거리며 갈 시각이란다. 오후 2시면 영사관 점심시간이니, 그때 가면 문을 닫을 거란 확신이었다. 그녀의 차를 대동해 도착하니, 담당자가 보자마자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믿거나 말거나.
"It's done!"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비자 발급 내역을 확인 후 기분이 호떡처럼 뒤집혔다. 영수증에 60달러란 불편한 숫자가 적혀 있었으므로. 그녀가 우겨서 건넨 900페소는 대략 75달러였다. 멕시칸 페소로 내란 이유가 이것이었나, 젠장! 벨리즈 영사관은 이 눈먼 여행자로부터 15달러의 짭짤한 수입을 챙긴 셈이었다.

산 페드로로 다시 돌아갔다. 빅마마가 "다시 왔네?" 하며 아무일 없었다는 듯 누런 이를 드러냈다. ‘벨리즈에 그렇게 오고 싶었어?’란 뉘앙스로. 애국자의 우회적인 표현 같기도 했다.
'너 보러 온 건 아니고, 벨리즈가 얼마나 가치 있길래 이리 비싼 비자를 받는지 확인하러 왔다.'
벨리즈 입국에 이만큼 투자한 것이 진정한 가치가 있었던가? 그에 대해선 긴 설 연휴 기간 떠나지 못하는 이를 위해 ‘염장 지르는’ 기사로 대답하려 한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처럼 to be continued…
좀 더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당시의 상황을 읽고 싶다면, 벨리즈 비자에 관한 리포트 벨리즈 비자 리포트1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여행의 선물
‘예측불허’한 상황에 종종, 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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