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발전기금만 주면 정교사 채용되게 도와줄게.”
10년 넘게 기간제 교사로 일하던 A(36ㆍ여)씨는 지난해 9월 온라인 채팅사이트에서 만난 정모(46)씨를 굳게 믿었다. 자신을 서울의 한 사립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통과한 변호사라고 소개한 정씨가 A씨를 만날 때마다 명품을 몸에 걸치고 나오는가 하면 어려운 법률 용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정씨와 연인 관계가 되자 A씨는 정교사 공채 중이던 한 고교에 취직하고 싶다는 고민을 조심스레 털어놨다. 정씨는 “맡았던 사건 관계자가 경기도의 사립고등학교 이사장이니 정교사로 채용되도록 해 주겠다”며 “대신 학교발전기금을 내라”고 말했다. A씨는 그 동안 모아놨던 적금을 해지해 정씨에게 총 다섯 차례에 걸쳐 8,720만원을 건넸다.
A씨는 정씨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A씨 어머니는 걱정을 거두기 힘들었다. A씨 어머니는 정씨 이름을 인터넷 법조인 검색 서비스에 입력해 봤다. 검색 결과 이름이나 나이 등 신상 정보는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뜨는 것을 확인한 A씨 어머니는 지난달 경찰에 정씨를 신고했다.
신고 접수 16일 만인 23일 경찰에 붙잡힌 정씨는 사기 전과자였다. 2008년에는 검사를 사칭했고, 2013년에는 국립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로 속여 각각 2년과 2년3월의 실형을 살기도 했다. 정씨는 출소한 지 채 2개월도 안 돼 온라인 채팅사이트에서 만난 여성들에게 같은 수법으로 범행을 벌였다. 정씨는 A씨에게 받은 돈으로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외제차량, 명품 의류 등을 구입하는 데 썼다. 경찰 압수 당시 정씨 수중에 남은 돈은 400만원도 채 안 됐다.
경찰 조사 결과 정씨는 A씨와 만나는 동안 채팅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B(35·여)씨에게도 자신을 변호사라고 사칭해 400만원을 뜯어냈다. 정씨는 결혼까지 약속한 B씨에게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데 비행기 값이 필요하다”고 속여 돈을 받아낸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구로경찰서는 정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고 1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 과정에서 정씨 휴대폰 메신저에 또 다른 여성 6명의 이름이 확인돼 정씨의 여죄를 조사 중”이라며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은 철저하게 신분을 확인하는 등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지후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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