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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발간되다

입력
2016.02.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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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2월 1일

‘창조’의 표지. 제호 아래 목차를 실었다.
‘창조’의 표지. 제호 아래 목차를 실었다.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가 1919년 2월 1일(발행일자 기준) 일본 도쿄에서 출간됐다. 평양 출신 19세 동갑내기 김동인과 주요한이 먼저 궁리해 이름까지 정한 뒤 동향 선배 전영택을 끌어들여 만든 잡지였다.

김병익의 ‘한국문단사’에 따르면, 둘이 의기투합한 건 18년 12월 25일 도쿄 유학생 청년회관에서 열린 한 모임에 다녀온 직후였다. 둘은 화로를 끼고 커피를 마시며 조선 독립을 두고 벌어진 모임의 논쟁을 복기하던 끝에 “정치운동은 그 방면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는 문학으로…”에 합의했다고 한다. 평양 갑부의 아들로 최신형 양복에 기차를 타도 2등차만 탔다는 김동인은 다음날 곧장 고향으로 창간비 200원을 보내달라는 전보를 쳤고, 전영택에 이어 김환, 최승만 등을 합류시켰다.

A5판(국판) 84면, 가격 30전. 창간호는 낱장을 재단하지 않고 접은 채 제본, 페이퍼나이프로 가르면서 읽도록 멋을 부렸다. 편집ㆍ발행인은 주요한, 판매소는 서울 동양서원과 평양 기독서원ㆍ광명서관이었다.(‘한국잡지백년’, 최덕교, 현암사)

거기 주요한의 ‘불놀이’와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이 실렸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로 시작되는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는 4ㆍ4조 7ㆍ5조의 정형을 깬 데다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운운하는 자유로운 시상으로 동시대 문학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이미 프랑스 상징주의와 일본 현대시에 익숙했다. ‘약한 자의 슬픔’은 ‘~이라’ ‘~하더라’같은 종결어투를 버리고 ‘~이다’’~한다’를 채용, 언문일치를 진일보시켰다. 3인칭 대명사를 성 구분 없이 ‘그’로 썼다. 훗날 김동인은 ‘조선근대소설고(1929)’에서 “He와 She들을 모두 ‘그’라고 하여 보편적으로 사용하여 버린 그때의 용기는 지금 생각하여도 장쾌하였다”고 회고했다. 시인 김행숙에 따르면 1920년대 초기는 물론이고 이후 오랫동안 ‘그녀’라는 대명사는 개발되지 않았던 어휘였다. 김동인은 ‘창조’를 통해 이광수류의 계몽주의(풍속 개량)와 권선징악에서 벗어나 ‘인생’과 ‘살아나는 고통’을 문학의 “본무대에 올리고자”했다.(‘창조와 폐허를 가로지르다’ 소명출판)

‘창조’가 나온 직후 도쿄 유학생들이 ‘2ㆍ8독립선언’을, 국내에서는 ‘3ㆍ1운동’이 일어났다. 총독부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지배전략을 선회했다. ‘개벽’ ‘폐허’등 동인지 형식의 문예지들이 잇달아 발간되고 신문들이 창간돼 작품 발표지면이 많아지면서 ‘창조’는 9호(1921년 5월 30일)를 끝으로 폐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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