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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약자 보호라는 이름의 관치(官治)

입력
2016.01.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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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전세난을 해결할 특단의 해법을 제안한다. 당정이 2, 3년마다 한 번씩 아파트 전ㆍ월세 가격이 적절한지, 상가 임대료 수준이 타당한지 따져보고 재산정하도록 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다. 언뜻 중립적인 내용으로 보이지만, 세입자와 임차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법이 될 것이다. ‘의원님’들은 심정적으론 집주인과 상가주인 편에 서 있을지 몰라도, 그 어떤 것도 표심보다 우선순위에 있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의 수백만 세입자와 임차인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선 임대료 인상을 억누를 것이고, 혹여 선거철과 맞물려 있기라도 한다면 ‘대폭 인하’라는 파격적인 선물도 내놓을 수 있다.

비싼 학원비 때문에 서민 가정의 허리가 휘고 있다면, 이 또한 유사한 해법을 제안한다. 주기적으로 학원비가 적정한지 따져보고, 정부가 일률적으로 학원비를 정해주면 된다. 물가도 안정이 될 수 있고, 서민들 부담도 덜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실제 이런 법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2012년 개정된 여신전문금융업법이다. 가맹점들은 고객들이 카드로 물건값을 결제할 때마다 카드사에 결제액의 일정 비율로 수수료를 내는데, 카드사들이 폭리를 취한다는 지적이 빗발치자 정치권이 탄생시킨 법이다. 연간 매출액이 3억원에 못 미치는 영세ㆍ중소가맹점 수수료율은 금융당국이 원가를 감안해서 정하되, 3년마다 재산정하도록 했다. 총선을 2개월 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법의 위력은 막강했다. 총선을 다시 5개월 가량 앞둔 작년 11월 정치권은 영세ㆍ중소가맹점들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안겼다. 영세가맹점들은 수수료율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으니, “땡큐, 의원님들”을 연신 외치지 않았을까 싶다. 여야가 “당정 협의를 통해 수수료를 대폭 인하한 건 우리 당입니다”(여당) “2012년 관련 법을 개정한 건 우리 당입니다”(야당)라며 서로 ‘내 공’이라며 우스꽝스러운 현수막 경쟁까지 벌였을 정도였으니까.

약자를 구제한다는 명분은 훌륭할지 몰라도 시장가격은 상대방이 있는 법이다. 공공요금이야 상대가 정부이니 정책적인 결정이 필요하다지만, 민간요금을 법으로 강제할 경우 시장이 왜곡되는 건 필연이다. 법의 보호대상이 아닌 일반가맹점들까지 국회를 찾아가 “왜 우리만 수수료를 인상하느냐”며 떼를 쓰더니, 결국 수수료 인상을 철회시킨 건 부작용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이번 수수료 인하로 카드업계가 연간 떠안아야 할 손실규모가 7,000억원에 육박하고, 그래서 여기저기서 카드 매각설이 끊이지 않는 현 상황은 그리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다. 카드사의 폭리가 있다면 카드 사용 의무화를 완화하는 등 다른 대안을 모색해봐야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구시대적인 가격통제에 나설 일이 아니다. 카드사보다는 영세가맹점과 소비자들이 더 우선 아니냐고 따져 묻는다면, 약자를 구제하기 위해선 집주인은 빚더미에 올라앉고 학원은 문을 닫아도 좋다는 얘기냐고 되묻고 싶다.

표심에 발목을 잡힌 정치권이야 논외로 치자. 정말 아쉬운 건 정치권의 명을 받들어 카드사를 압박하는 총대를 멘 금융당국이다. 금융당국 수장인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취임 이후 금융사 가격과 수수료는 자율에 맡겨 두겠다고 누차 공언했다. 그렇다면 금융사의 자율을 해치는 각종 외압에 적극 맞서야 했다. 법이 문제라면 법을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어야 했고, 무리한 수수료 인하가 문제라면 보다 객관적인 수수료 산정 절차를 제시했어야 옳다. “법이 만들어져 있고, 당에서 내릴 것을 주문하니까 금융당국으로선 어쩔 수 없다”는 항변은 전혀 공감할 수 없다. 이렇게 정치권에서 하자는 것에 대해 금융당국이 찍소리 한번 못하고 수용하는 한, 관치는 앞으로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래 놓고 금융사들에게 어떻게 금융개혁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영태 경제부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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