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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의 전설' 조훈현, 정치판 입문에 장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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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의 전설' 조훈현, 정치판 입문에 장고하다

입력
2016.01.3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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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보도에 의하면 새누리당의 일각에서 프로 기사 조훈현과 피겨스케이트 선수 김연아의 영입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김연아는 거절을 했고 조훈현은 검토 중이라는 것이다.

오해를 없애기 위해 조훈현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조훈현은 “개인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기에 바둑계 등 주위의 의견도 듣고 있으며 정책적으로 바둑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 사람쯤은 (국회의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있지만” “(정치권으로 가는 게) 옳은지 여부도 판단을 해봐야 할 것 같다”며 “수일 내 결정을 하겠다”는 것이다.

평소에 조훈현을 좋아하고 존경해 왔던 바둑 팬으로서 나는 조훈현의 새누리당 입당을 반대한다. 우선 조훈현에 대한 내 애정과 존경심에 대해서 말해 보자. 진실을 밝히자면, 조훈현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조치훈과 서봉수도 좋아하고, 유창혁이나 이창호나 이세돌, 그리고 박정환, 김지석, 목진석, 박지은 등도 좋아한다. 그러니까, 조훈현보다는 바둑 그 자체와 뛰어난 프로 기사 모두를 좋아하는 셈이다. 또,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의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와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그리고 중국 출신의 우칭위안(吳淸源) 등도 좋아한다. 그러나 좋아하면서 동시에 존경하는 사람은 조훈현뿐이다.

나는 바둑계의 조훈현, 영화계의 안성기, 만화계의 이현세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각자가 속한 분야에서 모두들 최고다. 실력도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하며 영향력도 크다. 게다가 다들 부드러우면서도 잘 생겼다. 조훈현의 경우, V라인 얼굴형과 보조개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아무튼, 이 분들은 모두 자기 분야를 제대로 대표하고 대변한다. 내 말은, 이 분들이 각 분야의 상징적 리더로서 그에 상응하는 책임감을 잘 깨닫고 있으며 또 그것에 걸맞게 실천하고 행동해 왔다는 것이다.

모든 애정 관계가 그러하듯이, 내가 바둑을 좋아하는 만큼 바둑이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은 아니다. 내 바둑 실력은 겨우 기원 급수 5급 정도다. 내 당구 실력은 4구 200점 정도인데 바둑 실력과 대충 비슷할 거라고 여기고 있다. 어디 가서 바둑이나 당구를 좀 한다고 큰 소리 치려면 기원 급수 2, 3급이나 4구 300~400점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고수 소리를 들으려면 바둑은 1급, 당구는 500~700점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1월 22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그랜드 힐튼 호텔에서 열린 '2016 전자랜드 프라이스킹배 한국바둑의 전설' 개막식에서 출전 소감을 말하는 조훈현 9단. 연합뉴스
1월 22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그랜드 힐튼 호텔에서 열린 '2016 전자랜드 프라이스킹배 한국바둑의 전설' 개막식에서 출전 소감을 말하는 조훈현 9단. 연합뉴스

내 경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낚시와 등산에는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물론, 모든 생선 요리를 좋아하고 특히 초밥이나 회는 아주 즐기는 편이며, 산에 대해서는 “정 그러면, 네가 나한테 오지 그러니?”라며 버티는 정도다. 바둑과 당구에 바친 돈과 시간을 딴 데에 썼더라면, 거짓말을 좀 보태서, 월세 집을 전전하는 신세는 면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바둑과 당구가 없는 내 인생은 훨씬 더 비참하고 지루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사적인 취미에 대해 시시콜콜 늘어놓은 것은 어느 정도는 내가 한국 50대 후반 남성의 취미 생활을 나타내는 표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국가나 정치권이 ‘바둑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이 그다지 필요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둑이 지금보다 더 보급되지 않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 때문이다. 우선, 바둑은 한중일 삼국만이 즐기고 있다. 무책임하게 달러를 마구 찍어가며 ‘돈질’을 해대는 미국 ‘넘’들이 바둑의 묘미와 즐거움을 깨우쳐서 세계 대회를 열지 않는 한, 더 이상 보급될 수가 없다. 바둑은 올해부터 전국 체전의 정식 종목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 종목이 되기는 불가능하다. 때에 따라 아시안 게임 종목이 되었다 말았다 하는 당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여성 팬과 청소년 팬이 확 늘지 않으면 바둑계는 지금보다 발전하기가 힘들다. 여성 팬을 늘릴 획기적인 방안이 없는 한, 바둑이나 바둑TV에게 남편을 빼앗긴 주부들이 바둑판을 내다버리거나 리모컨을 낚아채는 일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모든 기원에서 금연이 시행되지 않는 한, 여성들이 기원에 드나들지는 않을 것이다. 청소년들의 경우, PC 게임의 인기를 바둑이 당해낼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그렇다고 하면, 장기나 다른 보드 게임 및 PC 게임 등과 다르게, 유독 바둑만이 국가 및 정치권의 정책적 지지를 받아야 할 근거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야구의 홈런이나 축구의 승부차기는 관중이 야구나 축구를 실제로 잘 하지 못해도 그저 보고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바둑의 경우, 팬 자신의 실력이 상당하지 않으면 제대로 즐기기가 어렵다. 내 경우, 며칠 전에는 볼 만한 미드나 일드가 다 떨어져서, 바둑 사이트에 들어가서 몇몇 대국의 기보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저 PC 화면에서 자동적으로 놓아 본 것일 뿐이지, 대체 어느 수에서 승부가 갈라졌는지를 충분히 잘 알고 즐긴 것은 아니었다.

천재 조훈현(1953년생)이 한국 바둑에 끼친 공로는 다른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그는 만 9세 4개월에 입단하여 이 분야 세계 최연소 기록을 갖고 있다. 어린 시절 일본에 건너가서, 우칭위안을 길러낸 세고에 겐사쿠(?越憲作) 9단 문하를 거쳐서, 우칭위안과 함께 현대 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에게서 바둑을 배웠다.

군 입대를 위해 한국에 돌아온 조훈현은 1974년에 타이틀을 처음 획득한 뒤 1980년에는 평생의 라이벌인 서봉수 명인의 타이틀까지 빼앗으며 전관왕 자리에 올랐고, 이후 전관왕을 3회씩이나 달성한다. 한국 기원 최초로 9단에 오른 조훈현은 1989년 제1회 응씨배 결승에서 2대 3으로 역전승하면서 중국의 녜웨이핑(?衛平)을 꺾고 우승했다. 녜웨이핑은 1980년대 초 중일 수퍼대항전에서 근현대 바둑의 선진국이었던 일본의 프로 기사들을 모조리 무찌른 중국 바둑의 영웅이었다. 또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여서 키워냈다.

조훈현은 통산 160여 회에 이르는 타이틀 획득 기록을 갖고 있으며, 또 2,500회가 넘는 대국 회수 기록, 1,900승이 넘는 통산 최다승 기록도 갖고 있다. 조훈현은 1990년대 초 이창호에게 마지막 국내 타이틀을 빼앗긴 이후에도 1994년에 최초로 세계대회 사이클링 우승을 이뤄냈고 세계대회 11회 우승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1998년에는 도전자가 되어 이창호 당시 국수에게 승리한 적도 있다. 특히 만 50세가 되기 직전인 2002년에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사람은 20대 후반이 되면 머리나 체력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조치훈이나 후지사와와 같은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바둑과 수학은 20대 후반이 넘으면 정상의 자리를 계속 지키기가 매우 힘들다.

이런 조훈현에 대해서 새누리당 에서 영입을 타진하고 있고 게다가 조훈현 자신이 이를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는 조훈현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나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만약에 조훈현이 새누리당의 이념과 정책에 동의하고 있다고 한다면 조훈현의 새누리당 입당을 어느 누구도 말릴 수는 없다. 그것은 조훈현 개인이 가진 고유한 정치적 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바둑의 보급과 육성과 발전을 위한 ‘정책적 지원’을 위해서 새누리당에 가거나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결코 찬성할 수 없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이 다음 총선이나 대선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게다가 조훈현의 영입은 새누리당의 지도부가 정식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조훈현이 ‘더민주당’나 ‘국민의당’에 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대다. 현실 정치가 바둑이나 프로 기사를 이용해 먹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

2014년에는 여성 프로기사들이 직접 운영하면서 강의하고 지도하는 곳으로 ‘꽃보다바둑센터’가 생겼다. 만화 ‘미생’과 드라마 ‘응팔’에는 바둑 얘기가 많이 등장했다. 최근 ‘2016 전자랜드배 한국바둑의 전설’전이 열렸다. 조훈현 서봉수 조치훈 유창혁 이창호 5명이 풀리그 총 10경기를 벌여 우승자를 가리는 행사다. 조훈현은 조치훈에게, 조치훈은 서봉수에게 졌고, 유창혁은 이창호를 이겼다. 또, 이세돌은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상금 100만 달러를 내걸고 5번기 승부를 벌일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바둑 팬을 늘리는 좋은 길이다. 만약 내가 ‘바둑 황제’라면 새누리당의 제안보다는 신예 기사들의 최근 기보를 공들여 검토할 것이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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