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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도 불꽃 자유자재로... 과학 한국 우리 손에 달려

입력
2016.01.3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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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득(왼쪽) 동명이화학 대표와 김진웅 부대표가 대전 작업실에서 나란히 앉아 일하고 있다.
김종득(왼쪽) 동명이화학 대표와 김진웅 부대표가 대전 작업실에서 나란히 앉아 일하고 있다.

1960년대 이래 한국의 과학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1966년에 최초의 과학기술 종합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고, 1970년대 초부터는 대덕연구단지에 각종 정부출연연구소들이 속속 들어섰다.

이 연구기관들은 1970년대 중화학 공업의 발전을 견인했고, 1980년대 이후로는 전자, 컴퓨터 등 새로운 첨단 기술 분야로 영역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또 이 무렵부터 대학원을 중심으로 과학기술 연구 활동을 중시하는 대학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공부가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과학기술자들의 공부는 책상머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근대 이후 세계 과학자들이 이룬 성취는 책상머리가 아니라 실험실과 공방(工房)에서 나왔다. 1862년에 설립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모토는 ‘마음과 손’(Mens et Manus)이다.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좋은 과학자 또는 공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머리로 생각해 낸 물건을 손을 움직여 구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과학자가 직접 하기 어려운 작업을 도와주는 전문가들도 있다. 그들의 ‘손으로 하는 공부’는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보이지 않게 뒷받침했다.

공방에서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우다

대전 유성구 궁동의 허름한 상가 건물 2층에 ‘동명이화학’이라는 작은 공방. 이곳에서 일하는 김종득과 김진웅은 과학 실험용 초자(硝子) 가공의 장인들이다. 일본어에서는 초자를 한자로 ‘硝子’라고 쓰고 ‘가라스’(ガラス)라고 읽는데, 네덜란드어로 유리를 뜻하는 ‘glas’에서 온 말이다.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 초자 가공이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본 기술자들에게서 기술을 배운 한국인들이 해방 후 ‘광명이화학’이라는 업체를 세웠다. 1960년대 후반에는 세공(細工) 부서원만 40~50명이 될 정도로 번성했다. 주로 제약 회사에 앰플 병을 납품하거나 몇몇 정부 연구기관에 물건을 댔다.

김종득과 김진웅은 고등학교를 갓 나온 까까머리 시절인 1968년부터 광명이화학에서 일을 시작했다. 기술을 배우는 과정은 험난했다. 고달픈 생활을 버티지 못해 대개 3주가 안 돼 도망갔고,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3개월 단위로 신입들이 들어왔다.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선배들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경험 많은 선배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지켜보며 서로 경쟁적으로 일을 배웠다. 10대 후반의 이들에게 유리를 뜨거운 불에 달궈 입으로 불어가며 자유자재로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가는 모습은 매혹적으로 보였다. 김종득은 “기술 욕심이 대단히 많았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선배들이 모두 퇴근한 밤에 몰래 연습하다가 들켜 호되게 혼나기도 했다. 덕분에 광명이화학 출신은 난이도 있는 작업을 잘 한다고 업계에 널리 알려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연구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초자 가공 장인들이 줄지어 기관 전속 기능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광명 출신들은 KIST, 원자력연구소, 표준연구소, 고려대 등에 자리를 잡았다. 김진웅도 1978년에 홍릉의 한국과학원(지금의 카이스트)으로 이직했다. 일을 맡고 있었던 광명 출신 선배가 그 해 설립된 화학연구소로 스카우트되면서 생긴 자리였다.

카이스트 초자실은 거의 24시간 비상대기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평소에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주문한 물건을 제작해 주는 일을 했지만, 사용 중인 실험 도구에 문제가 생기면 한밤중에 자다가도 달려가 해결해 주어야 했다. 특히 미생물이 들어간 실험은 시급을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 한 달 동안 공들여 배양했던 결과물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진웅은 1989년 카이스트가 홍릉에서 대덕으로 이전할 때 같이 대전으로 내려와 2001년까지 20년 넘게 일하다 정년 퇴직했다. 퇴직하고도 카이스트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공방에서 근 50년 지기 동료인 김종득과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초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1,200도가 넘는 뜨거운 불꽃을 다뤄야 한다.
초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1,200도가 넘는 뜨거운 불꽃을 다뤄야 한다.

온몸에 축적된 한국 과학 연구의 역사

초자 가공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5평 남짓 되는 이들의 작업실에는 나지막한 낡은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앞에는 가스 버너가 설치되어 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굉장한 화력의 불꽃이 솟아오른다. 이날 작업은 카이스트 화학과 유룡 교수의 연구실에서 의뢰한 촉매 반응기였다. 유룡은 작년 톰슨로이터사에서 선정한 노벨화학상 수상 예측 인물에 국내 과학자로는 처음 이름이 올랐을 정도로 왕성한 성과를 내는 과학자다. 그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나노 다공성 물질을 이용한 고효율 촉매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동명이화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김진웅은 연구실에서 보내온 주문도를 살펴본 후 익숙한 솜씨로 가느다란 유리관을 집어 불꽃에 달구기 시작했다. 유리관 속에 필터를 집어넣어 고정시킨 후 때때로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어가며 모양을 만들어 갔다. 필요 없는 부분은 입김을 넣어 팽창시킨 후 살짝 깨 버린다. 복잡한 촉매 반응이 일어날 수 있도록 큰 유리관 안에 작은 유리관을 만들어 넣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 최고의 과학기술 연구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부심을 숨길 수는 없었다. 연구자들은 특정한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지만, 초자 가공에 있어서는 이들이 ‘박사’다. 하지만 가끔 이들이 ‘손으로 한 공부’의 가치를 폄하하는 연구자도 있다. “자기가 하라는 대로 딱 하라는 거여. 그런데 그 물건은 백 번 해도 안 되는 거여. 선배(교수)들이 다 해 봤던 거고. 나는 안 되는 걸 알아.” 일종의 갑질이다. 이럴 때는 그냥 주문 받은 대로 작업을 해 준다. 그러면 십중팔구 실험에 실패해 다시 돌아온다. 대학원생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많은데, 이제는 학생들이 말하는 것만 들어도 어떤 실험을 하려는 것인지 대강은 알 수 있다고 한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요구를 하면 몇 가지 조언을 해주고, 지도교수하고 얘기해 보고 다시 찾아오라고 한다. 숨은 지도교수 역할을 해 주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과학기술의 숨은 손들

복잡한 형태의 초자 기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섭씨 1,200도 이상의 불꽃을 다뤄야 한다. 도자기 장인들이 불꽃의 색으로 온도를 가늠하듯, 이들도 솟아오르는 불꽃 어느 부위에 유리관을 넣어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뜨거운 불꽃에 유리관을 집어넣고 균일하게 가열하기 위해 엄지와 검지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 덕에 두 장인의 지문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형태를 잡기 위해서 계속 입김을 불어야 한다. 새 물건을 만들 때는 그나마 낫지만, 수리 의뢰가 들어오면 기구 안에 들어 있던 각종 화학 약품들이 기화(氣化)되어 입으로 훅 들어와 코로 빠져나간다. 카이스트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수리 업무가 유독 많았던 김진웅은 벌써 두 차례나 암 수술을 받았다. 이렇듯 그들은 한국 과학기술 연구의 역사를 온몸에 축적하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김종득(오른쪽) 동명이화학 대표와 김진웅 부대표. 1968년 서울 광명이화학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여전히 함께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나란히 앉은 김종득(오른쪽) 동명이화학 대표와 김진웅 부대표. 1968년 서울 광명이화학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여전히 함께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열심히 읽는 것이 공부라고 배웠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공부하는 습관은 잃었을지언정 그 관념만은 또렷이 남아 있다. 선비를 숭상하는 유교 문화의 유산일 이러한 관념은 과학 및 공학 공부에서도 강고하게 작동한다. 어린 학생들에게 알고 있는 과학자를 물어 보면 대개 이론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과학기술 연구를 위해서는 ‘책으로 하는 공부’뿐만 아니라 ‘손으로 하는 공부’도 필수적이다. 1845년에 에너지 보존 법칙을 발견한 영국의 제임스 줄은 운동량과 열의 상호 등가성을 알아내는 실험을 하면서 가업인 양조장의 경험 많은 장인들 도움을 받았다. 과학 시간에 ‘줄의 법칙’에 대해서는 배우지만, 양조장 장인들의 이야기는 잊혀졌다. 현대 한국에서 이러한 장인들은 청계천 공구상가와 세운상가, 대전 대화동 공구상가 등지에서 한국의 산업과 과학기술 연구의 한 축을 지탱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장인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카이스트 초자실은 김진웅이 정년 퇴직한 후 후임을 찾지 못했다.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일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어서이다. 우리 사회가 보유하고 있었던 기능을 어떻게 유지ㆍ보존할지 깊이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공부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ㆍ과학기술사

공동기획 :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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