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의 구원자 로버트 스피처
“로버트 스피처가 없었다면 정신 의학은 점점 유효하지 않은 분야가 되어 전쟁 전의 미천한 상태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한 인물이 한 직종을 구원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정신의학은 절실하게 구원이 필요했고, 밥은 정말이지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쉼 없이 모비 딕을 쫓았던 에이헙 선장을 떠올리면 비슷할 것이다.”-‘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110쪽(앨런 프랜시스 저ㆍ김명남 옮김ㆍ사이언스북스)
정신 의학의 ‘미천한 상태’는 과학 저널리스트 앨릭스 슈피겔(Alix Spiegel)이 2005년 1월 ‘The New Yorker’에 소개한 예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글에 따르면 2차 대전 징병 검사에서 정신진단 부적격자로 탈락된 비율은 볼티모어 징병위원회의 경우 60%였고 위치타(Wichita)는 20%였다. 의학자 필립 애시(Philip Ash)는 1949년 논문에서 3명의 정신과 의사가 동일한 환자를 각각 본 뒤 같은 진단을 내놓은 비율이 20%에 불과하더라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신 의학이 정신 분석의 ‘꿈’속을 헤매고, ‘노이로제(neurosys)’가 정신병의 대명사처럼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프랜시스가 말한 ‘구원’은 정신 의학을 꿈에서 깨우는 일이었다. 정신 장애(질환)의 종류와 증상을 정해 분류하고 표준화해 병원과 학계가 매뉴얼처럼 활용함으로써 연구ㆍ진단을 체계화하고 신뢰성을 확보하는 일,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Ⅲ(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ㆍ DSM-Ⅲ)’을 세상에 내놓은 일이었다. 책 한 권으로 정신 의학의 전과 후를 나눈 로버트 레오폴드 스피처(Robert Leopold Spitzer)가 2015년 12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스피처는 1932년 5월 22일 뉴욕서 태어나 코넬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57년 뉴욕대 의대를 졸업했고, 뉴욕대 정신의학연구소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거쳐 컬럼비아대 정신분석 연수과정을 이수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그 진창(messiness) 속에서 과연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환자에게) 도움이 되긴 하는지 몰라 전전긍긍했다”고 훗날 말했다. 그에게 정신분석은 너무 추상적이고 이론적이었고, 진단ㆍ치료는 스스로도 신뢰할 수 없는 거였다. 그는 진료를 중단하고 우울증 등에 대한 인터뷰 진단 기법 연구에 몰두했다.
66년 그렇게 ‘방황’하던 그에게 ‘DSM-Ⅱ’편집 책임자였던 어니스트 그루엔버그(Ernest M. Gruenberg)가 편람 정리작업이나 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응했고, 뜻밖에 열심히 잘했다. ‘컨설턴트’자격의 사실상 보조자였지만, 거기서 돌파구를 본 거였다. 부당 3.5달러짜리 136쪽 분량의 DSM-Ⅱ는 68년 발간됐다.
미국정신의학협회(APA)가 그에게 개정판 편집 책임을 맡긴 건 1975년이었다. 43세 젊은 연구자가 맡기엔 중책으로 보이지만 당시로선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분석’이 아닌 ‘진단(Descriptive Psychiatry)’은 거들떠보는 이 없는 후진(backwater) 분야였고, 진단 매뉴얼 ‘DSM’은 52년 초판이 나온 이래 “제 분수에 맞게 조용히 숨어 있는(…) 크게 신경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없”(위 책)는 책이었다. ‘DSM-Ⅲ’의 편집진으로 활약한 컬럼비아대 도널드 클라인(Donald Klein) 교수는 “당시 그 일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고, 아마 그래서 그가 지명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APA 회장단으로부터 편람 편집 전권을 부여 받은 스피츠는 장애 분야별 25개 위원회에 각각 젊은 연구진ㆍ임상의들을 발탁해 의욕적인 ‘끝장토론’을 이끌어갔다. 그 풍경은 프랜시스의 책(112~115쪽)에 비교적 상세히 소개돼 있는데, “비르투오소의 공연을 보는 느낌이었다”고, “(위원들은) 사실상 방에 갇혀 합의에 이를 때까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고 썼다. 스피처는 내내 구석에 앉아 발언 내용을 받아 친 뒤, 타협안을 만들어 다시 논쟁하게 하게 하는 식으로 토론을 진행했다. 단 하나 원칙은 발언 근거가 경험적ㆍ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거였다. (정신분석의) 도그마와 권위를 경험과 데이터로 교체하고자 한 그들을훗날 학계는 ‘돕스(DOPsㆍData Oriented Peoples)’라 불렀다. 멤버였던 진 엔디코트(Jean Endcott)는 “그 시절 우리 돕스에겐 19세기를 벗어나 20세기로 나아가자는 결의, 그 문턱을 제일 먼저 넘어 우리가 아는 것을 적용하자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스피츠는 매주 70~80시간씩, “모비 딕을 쫓는 에이헙 선장”처럼 그 일에 매달렸다.
4년 뒤인 79년 스피츠의 초안을 받아 든 APA의 ‘프로이디언(Fruedian)’ 심사ㆍ평가위원회는 먼저 그 방대한 분량에 경악했다. DSM-Ⅲ는 68년판(DSM-Ⅱ)의 4배가 넘는 567쪽에 달했다. 그리고, 철저한 ‘반 프로이드적’ 내용에 분노했다. 예컨대 거기엔 ‘노이로제’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물론 출판을 위해서는 위원회의 승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편집진과 위원회가 타협점을 찾는 데만 수 개월이 걸렸다. 양측은 회장단의 중재로 “서너 군데 항목에 한해 ‘신중한 괄호(discreet parentheses)’속에 ‘노이로제’를 남기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 해 5월 시카고에서 열린 APA총회에서 스피츠는 DSM-Ⅲ 최종본을 발표했다. 편집진이던 로저 필(Roger Peele)은 “발표가 끝나자 좀체 보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350여 명의 참석자 전원이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한 거였다.(…) 힐끔 봤더니 스피처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더라”고 회고했다(뉴요커, 위 글). 80년 출간된 책은 매년 수십만 권이 팔리며 정신 의학ㆍ제약 분야의 ‘바이블’이 됐고, 의료정책과 범죄 재판, 보험, 드라마ㆍ영화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87년 개정판(DSM-ⅢR’과 ‘DSM-Ⅳ’(1994), ‘DSM-5’(2013)가 잇달아 나왔다. 분량도 늘어났고, 새로운 정신질환 항목들도 속속 등장했다.
스피처는 1973년 동성애를 DSM 정신질환 항목에서 공식 삭제토록 한 일등공신이었다. 69년 스톤월 항쟁 이후 게이 인권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규정한 APA에 대한 저항도 거셌다. 72년 뉴욕서 열린 행동치료학회에 동성애자 인권단체 회원들이 몰려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당시 스피처의 생각도 ‘동성애= 질환’이라는 APA 공식 입장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생각 자체를 안 해봤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DSM-Ⅲ 편집을 맡기 전이었지만, 그는 장애나 질환이라면 고통이 있어야 하고 경험적ㆍ과학적으로 검증돼야 한다는 자신의 정신 의학 소신을 적용해 연구ㆍ면담조사에 착수했다. 73년 초 한 동성애자가 그에게 정신 의학 업계 ‘클로짓 게이’들의 아지트였던 한 비밀 술집에 그를 초대했다고 한다. 온라인 매체 ‘towleroad’는 스피처가 거기서 저명한 정신의학자들을 만나 면담한 게 입장을 선회한 결정적 계기였다고 썼다.(towleroad.com, 2015.12.27) 스피처는 그 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APA 학회에 동성애 문제를 논의하는 별도 패널을 열게 한 뒤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의학적 질환으로 분류하기 위해서는 (정신ㆍ신체적) 주관적 고통이 있거나 사회적 활동에 객관적 장애가 있어야 한다.(…) 그런 증거가 있다면 보자.” 그 해 12월 APA는 동성애 조항을 DSM-Ⅱ에서 공식 삭제한다고 발표했고, 스피처는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거대한 장벽 하나를 허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2001년 그는 동성애 ‘교정 요법’의 효능을 인정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고,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하루 아침에 게이들의 배신자”가 됐다. 그는 200명(남성 143명)의 ‘전(前) 동성애자’를 전화 인터뷰한 결과, 의지만 강하다면 교정요법을 통해 성 지향이 ‘교정’될 수 있고, 교정된 남성의 66%ㆍ여성의 44%가 이성애 관계를 1년 이상 지속적으로 영위하고 있으며, 정서적 만족도도 10을 기준으로 최소 7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그는 조사 대상자가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동성애에 강한 편견이 있는 치료자들의 처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면접 과정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세밀히 묘사하는 등 도무지 지어낸 얘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워싱턴포스트, 2001.5.9) 당시 그는 “나는 동성애에 아무런 편견이 없다”고 전제하며 “학문적 가치와 정치적 해석은 엄밀히 구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Timeshighereducation, 2003.10.3)
‘미국정신의학저널(AJP)’은 그의 논문 수록을 거부했지만, 논란 끝에 국제성학회(IASR) 기관지 ‘Achives of Sexual Behavior(ASB)’에 실렸다. 그의 컬럼비아대 동료 정신의학자인 밀턴 웨인버그(Milton Wainberg)는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스피처라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엉망으로 디자인된 연구 논문이 ‘호모포빅’을 정당화하고 동성애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엉망으로 디자인된 연구”라는 비판의 근거는 사실 명확했다. 표본들을 반동성애자 그룹이 제공했고, 전화 인터뷰라는 방법도 문제였고, 그들이 양성애자일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고…. 물론 보수 기독교단 등 반동성애자 진영은 열광했고, 그의 논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스피츠는 “내 연구 결과가 과장되거나 동성애자 인권을 공격하는 데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NARTH, 2006.8)거나 “성지향 변화가 가능은 해도 고작 1~2% 정도의 확률로 극히 드물 것”(NYT, 2007.2)이라는 등 조심스럽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스피처가 ASB에 2001년 논문 철회를 공식 요구하고 동성애자 진영에 사과한 것은 무려 11년이 지난 2012년 4월이었다. 그는 ASB 편집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2001년 논문으로 자신이 물어야 했던 올바른 질문은 ‘성 지향이 바뀔 수 있느냐’가 아니라 ‘교정요법을 받은 이들이 자신들의 성지향 변화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느냐’일 뿐이었고, “그건 논문 주제로서 전혀 흥미로운 질문이 아니다”라고 인정했다. 신뢰성의 하자도 물론 수긍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편 데 대해 게이 커뮤니티에 사과한다. 내 논문을 보고 교정요법을 받음으로써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 동성애자들에게도 사과한다.”(truthwinsout, 2012.4.25)
그 무렵 그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내가 직업적으로 후회하는 단 하나가 바로 2001년 논문”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그가 인터뷰 끄트머리에 “정신의학 역사에서 자신의 논문이 데이터를 완전이 오독했다고 인정하는 공개 서신을 쓴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다. 독자에게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한 사람이 있나? 그거 대단한 거 아닌가?”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썼다.(2012.5.18) 그는 고집 센 싸움꾼이었지만 눈물도 많았던 듯하다.
‘DSM-Ⅲ’의 인격장애 항목을 맡았던 프랜시스는 ‘DSM-Ⅳ’의 편집 책임자가 됐다. 그가 ‘DSM-5’출간 전인 2013년 저 책을 쓴 까닭은 편람의 가치보다는 폐해, 즉 정신병 진단 인플레이션을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편집진의 무책임한 과욕과 허영심, 의약업계의 탐욕으로 온갖 억지 정신 질환이 양산돼 과잉 진료가 난무하는 현재, 더 악화하게 될 미래를 그는 경계했다. 머리말에서 프랜시스는 “미국 성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정신 의학적 문제로 적어도 한 가지 약을 먹고”있고 “2005년 이래 미국의 현역 군인들에 대한 향정신성 의약품 처방이 무려 8배로”늘어났고 “요즘은 불법 마약보다 합법 처방약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오거나 죽는 사례가 더 많”다고 밝혔다. 거기에는 스피처의 책임도, 그의 책임도 물론 없지 않을 것이다. “프로작과 DSM-ⅢR은 둘 다 1987년에 등장했다. 프로작 판매량이 치솟은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DSM의 중증우울증 정의가 지나치게 느슨한 탓이었다.”
스피처는 2003년 은퇴 직전 발병한 파킨슨 병과 투병하면서 말년까지, 오랜 친구 프랜시스와 아내이자 동료 재닛 윌리엄스(Janet Williamsㆍ컬럼비아대 석좌교수) 등과 함께, 다시 병들어가는 정신 의학을 치유하기 위해, DSM의 타락과 진단 인플레를 막기 위해 싸웠다. 사인은 심장병 합병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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