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살인사건’은 한때 검찰에 자부심을 안겼다. 1997년 4월 3일 밤 서울 이태원 햄버거가게 1층 화장실에서 휴대용 칼에 9차례나 찔려 홍익대생 조중필(당시 22세)씨가 숨진 사건. 살인 현장에 있던 두 사람 중 에드워드 리(37)를 진범으로 특정해 재판에 넘기고 1ㆍ2심에서 살인죄가 인정됐을 때, 검찰은 아더 존 패터슨(37)을 진범으로 지목한 미군범죄수사대(CID)의 초동수사 결과를 성공적으로 뒤집었다며 자찬했다. 하지만 1998년 대법원에서 원심 판단은 깨졌다. 관광버스를 몰다가 라디오에서 소식을 들은 아버지 조송전(76)씨는 운전대를 놓고 목을 놓아 울었다. 어머니 이복수(74)씨는 주저 앉아 망연자실했다. 미국으로 도피한 패터슨을 국내 송환해 29일 법정최고형으로 심판하기까지 거의 조씨가 살아온 생애에 달하는 시간이 걸렸다. 이 세월 동안 관계자들은 이 사건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한 명만 주범” 패착에 19년 소모: 수사 검사
법의 심판이 제대로만 이뤄졌다면 아물어 갈 법도 한 조씨 가족의 상처를 오래도록 덧나게 만든 것은 예단에 사로잡힌 검찰 수사 탓이 크다. 당시 수사 검사는 박재오(57) 변호사였다. 그는 패터슨을 진범이라고 지목한 CID와 둘을 공동정범으로 보고 사건을 검찰에 넘긴 용산경찰서 강력팀 형사들과는 달리 생각했다. 그는 둘 중 리만 진범으로 보고 1997년 4월 26일 기소했고, 패터슨은 흉기소지와 증거인멸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키 172㎝, 몸무게 63㎏인 패터슨보다 키 180㎝, 몸무게 105㎏으로 체구가 큰 리가 조씨를 제압하기 쉬웠을 것이란 논리였다. 조씨가 찔린 목의 상처가 위에서 아래로 향한 데다 조씨가 저항한 흔적이 없어 조씨보다 체구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일 것이라는 당시 부검의 이윤성 서울대 의대 교수의 소견이 결정적이었다. 거짓말탐지기 결과, 패터슨에게는 진실 반응이, 리에게는 거짓 반응이 나온 것도 영향을 줬다. 그러나 대법원은 패터슨의 손을 흠뻑 적신 피와 증거인멸 행동 등을 문제 삼으면서 부검의 소견과 거짓말 탐지기에 큰 증거능력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당시 4년차이던 박 검사는 대법원이 증거불충분으로 리 사건을 파기환송하자 2년 뒤인 2000년 검찰을 떠났다. 이 사건의 여파가 컸다고 한다. 그는 고향 전북의 한 로펌에서 일하고 있다. 2011년 “둘을 공범으로 기소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던 김락권 용산서 형사는 2013년 3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 측 대리인인 하주희 변호사는 “이번처럼 과거에도 둘을 공범으로 기소 못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재수사로 2011년 12월 22일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기소한 박철완 부산고검 부장검사는 지난 15일 결심공판 때 이렇게 밝혔다. “사건 기록을 보면 둘이 공범일 가능성이 정황상 농후하고, 그들이 진실을 말한다고 담보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사건 당시 수사)검사는 둘 중 한 명의 진술은 사실일 것으로 속단해 혈흔 등 증거 수집을 소홀히 했다. 진범을 법정에 세우기까지 유족에게 큰 고통을 겪게 해 죄송하다.”
주범-목격자-공범으로: 에드워드 리
애초에 살인 혐의로 기소된 리는 1997년 10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1998년 9월 서울고법(파기환송심)에서 무죄로 석방됐다. 국적은 미국이나 한국계인 리는 이듬해 3월 국내 대학에 입학해 새 삶을 시작했다. 이후 결혼해 아들도 낳고 가정을 꾸리고 사업차 미국을 오가면서 살았다.
리는 이번에는 패터슨이 진범임을 밝히는 증인으로 다시 법정에 섰다. 서로 상대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던 19년 전 상황이 똑같이 반복됐다. 하지만 피고는 바뀌었다. 리는 일관되게 “패터슨이 피해자를 찔렀다”고 증언했다. 2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 심규홍)는 리를 공범이라고 판단했지만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그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패터슨 송환: 사설탐정부터 법무부장관까지
1998년 9월 리가 무죄를 선고 받자 조씨 부모는 40여일 뒤 패터슨을 처벌해달라는 고소장을 검찰에 냈다. 1ㆍ2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은 패터슨은 고소장 접수 석 달 전 형 집행정지로 수감 7개월여 만에 천안소년교도소를 나왔다. 급기야 담당 검사가 인사이동 등으로 패터슨의 출국정지 연장을 깜빡한 사이, 단 이틀의 공백을 놓치지 않은 패터슨이 1999년 8월 미국으로 떠났다. 그 해 말 유족은 “직무유기를 했다”며 담당 검사를 검찰에 고소했으나 무혐의 처분이 났다. 유족은 극심한 분노와 허탈함에 빠졌다.
유족들은 2000년 초 사설탐정까지 고용해 패터슨의 행방을 찾았지만 실패했다. 어머니 이씨는 “패터슨이 출국했는데도 검찰은 아직 출국 안 했다, 나가도 인천국제공항으로 나간다고 거짓말하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인 게 상처로 남았다”고 했다.
또 법무부는 2009년 10월 15일 미국 법무부로부터 패터슨이 미국 법원에서 재판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도 두 달 간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지 않았다. 1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질의를 받고서야 당시 이귀남(65) 법무부 장관은 “(범죄인 인도 요청을) 최대한 빨리 하겠다”고 답했다. 지난해 9월 23일 패터슨이 16년 만에 송환됐을 때 법무부는 “한미 사법공조의 극적인 사건”이라고 자평했다.
진실과 거짓 사이를 가른 이들
박 검사는 손을 뗐지만 CID 수사 관계자와 참고인 등 10여명은 18년 뒤에 다시 열린 심판의 장에서 과거 판단을 뒤집는 진술들을 쏟아냈다. 부검의 이윤성 교수는 지난해 11월 “키가 작은 사람도 팔을 올리면 목을 수평으로 찌를 수 있으며, 피가 많이 묻은 쪽이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자신의 과거 소견은 일반적인 가능성일 뿐이었다고 재차 언급했다.
당시 CID 수사 책임자이던 미국인 J씨는 3차 공판에서 “조사했던 참고인 15명이 패터슨이 조씨를 찔렀다고 진술했다”며 “한 명만이 리가 찔렀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패터슨”이라고 증언했다. 과거 패터슨이 칼을 소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가 번복했던 점도 들었다. 그는 그날 밤 이복수씨에게 “나도 하나뿐인 아들을 조씨의 나이만 할 때 오토바이 사고로 잃어 그 마음을 잘 안다”며 위로했고, 이씨는 “증언을 위해 미국에서 와줘서 고맙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현성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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