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으로 시작하는 산울림의 ‘청춘’은 초등학생 때 처음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구슬프고 허망한 기분이 들게 하는 노래다. 어딘가에서 마음이 풀려나게 될 때 곧잘 흥얼대곤 한다. 하지만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는 경우엔 외려 마음에서부터 절로 박자를 타게 되는 그 노래가 마뜩치만은 않다. ‘가고 없는 날’을 다시 잡으려는 고집 때문일까. 모르겠다. 미련이나 회한에 잠겨 스스로 처량해지는 걸 경계해서일 수도 있다.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 순간엔, 나 자신이 세계로부터 이격되는 기분도 든다. 내가 했던 일, 내가 느꼈던 감정 따위가 영화 스크린 속에서나 존재했던 것 같아지면서 스스로 소외되는 기분. 체념은 아니다. 그렇게 더 명징하게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되는 순간엔 다 끝났다고 실감했던 것조차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있어 새로운 각도에서 빛을 받고 있다는 자각이 드니까. 생물학적 나이론 이미 한참 지나버린 ‘청춘’이지만, 그 노래를 처음 듣고 흥얼댔던 초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같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심사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설레기도 한다. 왠지 여전히 청춘이거나 한 번도 청춘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노랠 계속 흥얼거려 본다. 부러 보내지 않고 돌아서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나대로 여전히 명쾌한 아이로 있고 싶은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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