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게 무슨 일이람.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런 남우세스런 광경이라니. 양심이 있으면 저런 짓은 못하지. 내가 상상력이 지나친 거겠지.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치앙마이에서 다시 겨울을 나며 태국어 학원에 다닌 지도 어언 한 달. 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돌아올 때마다 나는 넋 나간 여자처럼 중얼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다.
이 모든 게 존 때문이다. 뉴욕에서 온 존은 아무리 젊게 봐줘도 육십 대 후반. 수염도 머리도 하얗게 센 존이 우리 반에서 가장 어린 일본 친구 마이코에게 작업을 거는 모습이 나에게 딱 걸린 거다. 문제는 마이코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는 것. 내 추측을 애써 부인하다 며칠 전 수업이 끝난 후 마이코에게 다가갔다. 존보다 서둘러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니 기뻐하면서 따라온 마이코. 은근슬쩍 존 이야기를 꺼내니 기다렸다는 듯 털어놓는다. 자기 아빠보다도 나이가 많은 존이라 처음엔 단순한 호의라고 생각했다고, 수업 후 늘 기다리는 상황이 부담스러워 오늘은 “노(No)”라고 해야지 결심했지만 화를 낼까 무서웠다고. “오늘 불러줘서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라며 웃던 마이코가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내 고향 뉴욕은 치즈 케이크로 유명한데, 이건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라며 존이 건넸다는 치앙마이 치즈 케이크. 달기만 하고 물컹한 그 치즈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나는 신나게 존을 흉봤다.
그 후 수업이 끝난 후 마이코와 함께 나서는 일을 두 번쯤 하니 더 이상 존은 마이코를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업에 꼬박꼬박 나오는 존을 보니 어째 내 자신이 좀 못나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고 좋아하는 감정을 비난할 자격이 나에게 있을까 싶었다. 마흔 살 넘는 나이 차의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고 욕을 먹어야 하는 걸까. 나에게도 노인이 젊은 여성을 사랑하는 건 추하다는 편견이 있었던 거다.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 든 남자의 사랑은 추문에 가까운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아니, 사랑도 아닌 무책임한 욕정이나 희롱에 불과한 이야기들이었다. 돈과 권력을 내세워 관계를 맺는 법만을 아는 남자가 젊은 여성에게 다가가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적 욕망을 드러낸 후 문제가 생기면 “딸 같아서 그랬다”를 변명이랍시고 하는 못난 남자들. 무성애자인양 접근해서는 남자로서의 욕망을 제멋대로 드러내고, 그게 거부될 경우 다시 아버지나 삼촌으로 도망가는 비겁한 남자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자주 들려왔던가.
적어도 존은 주책 맞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마이코에게 남자로서 다가갔다. 솔직히 관심을 표명하고 그 마음이 거절당한 후에는 다시 남자답게 받아들였다. 어떤 남자들은 여자만 보면 시도 때도 없이 몸을 탐하려는 행위가 폭력인 줄도 모르고 저지르는데 비해, 존은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치즈케이크를 고르며 시간을 보내는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 그 치즈케이크가 조금만 더 맛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존이 처음부터 남성으로 다가갔기에 마이코도 경계를 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더는 불쾌한 일이 생기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한편으로 자신의 육체적 나이를 장애로 생각하지 않는 존의 열린 마음이 부럽기도 했다.
나도 할머니가 된 어느 날, 젊고 멋진 청년을 어학원에서 만나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생길까. ‘내 고향에선 김치가 유명한데 여기 김치는 어떨지 모르겠다’며 치앙마이에서 산 김치를 건네게 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엄마나 이모 같은 이름 뒤로 숨지 않기를 바랄 뿐.
p.s. 마이코의 뒷이야기.
어느 날 마이코가 버스에서 만난 점잖은 일본 할아버지. 매너가 좋아 의심 없이 연락처를 드렸더니 얼마 후 연락이 왔다. 값비싼 레스토랑에 그녀를 데려간 할아버지. 예쁜 친구 있으면 같이 만나자는 둥 ‘에로 오야지(호색한 할아버지)’의 본색을 아낌없이 드러냈단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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