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근로정신대에) 자원만 하면 강제 징용을 거부하고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간 오라버니가 집에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해방 전해에 일본까지 건너갔는데 오라버니는 해방 후에나 만날 수 있었다.“
28일 인천 부평아트하우스에서 열린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에게 듣는다’에 참석한 강모(84) 할머니는 70년 전 징용 당시를 생생하게 전했다. 평화도시만들기 인천네트워크 주최로 작년 9월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행사다.
강 할머니는 13살 때인 1944년 12월 고향 서울을 떠나 일본 도야마시의 후지코시 군수공장으로 건너갔다.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조선의 어린 소녀를 속여 대대적으로 데려가던 시절이다.
강 할머니는 “해방된 해 10월 고향으로 돌아와 오라버니를 만났다”며 “내가 자원한 후에도 오라버니는 (형무소에서) 나오지 못하고 결국 해방된 뒤에야 풀려났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날 증언 자리에는 이자순, 김은숙, 박임순 할머니도 참석했다. 13, 14살 나이로 징용돼 후지코시 공장에서 항공기 부속품을 만들었던 동갑내기 할머니들은 이날 처음 만났다. 할머니들은 통성명을 하고 연락처를 주고 받으면서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장수경 평화도시만들기 인천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할머니들은 같은 시기에 일했으나 서로 다른 공장에 머물러 만나기는 오늘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날 할머니들은 70년 전 징용 당시를 마치 어제 일인 듯 상세하게 증언했다.
박 할머니는 “밥 서너 숟갈 먹고 하루 종일 기계 앞에서 일하다 기숙사에서 지쳐 잠드는 게 일상이라 허기를 채우려 날감자까지 먹었다”며 “함께 일하던 친구는 일본인에게 괜한 미움을 사 딱할 만큼 얻어 맞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창씨 개명을 안 했더니 일본인 선생님이 일본에 갈 사람으로 나를 지명했다”며 “조선말 한다고 배급을 안 주고 창씨개명 안 했다고 불이익을 주곤 했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할머니들을 비롯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인정 받은 피해자는 인천에 모두 7명이 생존해 있다. 이들은 작년 11월 제정된 ‘인천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여성근로자 지원 조례안’에 따라 올해부터 생활비, 의료비 등을 지원 받는다.
한편 인천에서도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 추진된다.
인천평화복지연대, 인천여성회 등으로 구성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인천행동’(인천행동)은 올해 중으로 소녀상을 건립하기로 하고 장소, 모금액수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인천행동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를 촉구하는 1억명 서명운동도 병행하고 있다.
이광호 인천평화복지연대 사무처장은 “60여개 단체와 개인들이 소녀상 건립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면서 “8ㆍ15광복절 전 혹은 올해 중 건립을 목표로 소녀상 관리를 맡을 자치단체 섭외와 모금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환직기자 slamh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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