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건 여간 면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결재라인에서 흔쾌히 OK 사인을 받았고 서류도 전자결재로 간단히 끝났지만,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도는 의례적 절차가 남아 있었다. 대부분 순산하라, 당분간 못 보게 돼 아쉽다는 정감 어린 인사였으나 해외 연수를 가는 것처럼 당당한 입장은 아니지 싶어 움츠러들었다.
나는 우리 회사에서 두 번째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두 번째 기자다. 5년 전 갖은 회유와 약간의 압박을 뿌리치고서 육아휴직을 쟁취했던 선배 덕분에 별다른 고민없이 휴직원을 낼 수 있었지만, 누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겸연쩍었다. 저출산이 고민인 시대에 육아휴직을 보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관대해져야 마땅하다는 기사를 줄곧 써댔지만 사실 상비 인력을 둘 여력을 가진 회사가 얼마나 되겠나. 육아휴직이 달갑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한 사람이 아쉬운 마당에 1년의 공백은 분명 회사와 동료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행복하지 못한 개인은 절대 일에 충실할 수 없다. 열댓 명 낳을 것도 아니고 일생에 한둘인데 지금을 누리고 더 열심히 일하자는 각오를 다지는 게 옳다고 자위했다.
첫 아이를 낳고 붙은 워킹맘이란 타이틀은 아무래도 기껍지 않았다. 아이를 오롯이 챙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일에도 열중하지 못하는 반쪽인간이라는 조롱으로 들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강요 아닌 강요를 받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한국의 육아문화는 여자에게 참으로 가혹하다. 워킹맘은 있지만 워킹파파는 없다. 뭐든 엄마 탓이다. 다시 출근해야 할 날이 오면 ‘그래도 세 살까지는 엄마가 끼고 키워야 잘 큰다’는 훈수를 또 들어야 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엄마 노릇도 일도 잘 하고 싶다.
첫 아이를 15개월부터 외할머니 손에 맡겼고, 18개월부터는 어린이집에 보냈지만 큰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딸이 일하는 걸 물심양면 응원해 준 엄마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24시간 아이 옆에 붙어있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컸다. 충실하게 아이에게 몰두하며 보낸 1년의 휴직 덕분에 육아에 대해 어느 정도 심적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갓난쟁이를 직립보행이 가능한 단계까지 키워내는 건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엄마에게 더없이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다. 목도 가누지 못하던 아이가 드라마틱하게 성장해 돌 즈음 제법 의사 표시를 하는 걸 보면서 나는 앞으로를 걱정하기보다는 이제 좀 컸구나 싶어 안도했다.
꽤 커서까지도 두살 터울 남동생과 엄마 옆자리 쟁탈전을 벌였던 주제에 아직 어린 내 아이에게는 너무 매몰차지 않나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잠깐이었다. 다시 일을 할 수 있어 기뻤다. 물론 걱정없이 일 하라며 주중에 우리 집에서 지내며 아이를 키워 준 엄마에 대한 미안함은 컸다. 하지만 얼마 전 딸이 상 받는 자리에 참석해 뿌듯해 하시는 모습을 보며 그 노고에 얼마간 보답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 사회는 진보한다. 다만 정체됐다가 도약하는 식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분투해야만 하는 ‘낀 세대’가 나온다. 10년 전만 해도 육아휴직은 언감생심이지 않았나. 머지않은 미래에는 스웨덴처럼 전업주부라는 말이 없어지고 육아에 있어서도 성 역할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첫 아이를 낳고 남편에게 일주일 중 출근 부담이 없는 하루 이틀은 아이를 데리고 잘 것을 권했다. 독박육아의 억울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갓난쟁이를 데리고 불면의 나날을 보내면서 남편도 진짜 아빠로 거듭났다. 배고프다, 기저귀 갈아달라는 ‘베이비 사인’을 일찍 터득했음은 물론 아이와 엄마처럼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애착 형성이 잘 되니 남편도 아빠의 자리를 제대로 찾았고, 우리 부부는 육아의 기쁨도 고달픔도 나눌 수 있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인터넷을 뒤지다 두 번째 육아휴직 중이라는 아빠를 발견했다. 세상이 변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엄마 아빠 모두 육아휴직을 쓰는 게 보편화된 사회가 하루빨리 당도해서 이런 겸연쩍은 글 따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으면 좋겠다.
채지은 기획취재부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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