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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기]조선에 유입된 명의 청화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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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기]조선에 유입된 명의 청화자기

입력
2016.01.2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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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선덕청화백자운룡문주해, 뉴욕메트로폴리탄박불관 소장

중국 명나라 시대는 송·원에 이어 중국자기가 전 세계 시장에서 최고 하이테크 산업으로서의 명성과 지위를 확고히 다진 시기였다. 중국의 '수출도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 도자시장을 흔든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최고 무역 상품이었다. 조선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아랍·유럽에 까지 수출됐다. 당시 중국도자기는 현지 왕족·귀족 등 상류층으로 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특히 유구(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옛 왕국)의 경우 해상 중계무역의 대국으로 성장하여 명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한편으로 중국도자기를 자신들의 무역상품으로 삼아 동아시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명의 도자가 조선에 유입된 것은 세종 때부터이다. 명과 조선은 사행과 무역을 통해 끈끈한 교류를 이어갔다. 중국 도자기는 조선의 사절을 통한 명 황제의 하사품을 비롯해서 유구와 일본을 통해서도 유입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세종 즉위 원년에(1418) 유구국의 둘째 아들 하통련이 청자기 10개와 청자화병 하나를 보내왔는데 여기서 청자는 명의 청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13년(1431)에도 유구국이 청자배 1벌을 바치는데 유구의 중계무역은 14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중반에 걸쳐 절정기를 맞이했다. 유구로 부터의 자기유입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성종8년(1477) 유구국왕이 종수기청자와 청자 향로 1개를 보내왔고 성종11년(1480)에도 청자주해와 청자발을 보내왔다.

조선은 유구를 통해 조선술과 사탕·남방 특산물을 얻을 수 있었다. 유구는 조선으로부터 직물·인삼과 같은 약재, 대장경을 비롯한 각종 불교서적을 구매할 수 있었다.

세종 10년(1428) 명 황제가 백소자기 10탁, 배자청화대반 85개, 소반 5개를 보내는데 '백소자기'는 아무 문양이 없는 백자를 '탁'은 대중소 크기의 접시와 발등이 모여 이루는 테이블 세트를 말한다. 청화백자는 커다란 반과 작은 반 5개씩이 하사품으로 전달되었다.

세종 11년(1429)에도 백자영양문다완 30개, 백자파다병 15개등이 명황제로부터 하사되었다. 세종 11년(1429)과 세종12년(1430)에도 명황제가 하사한 기록이 나타난다.

명의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청화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조선조정은 이에 화려한 명의 청화백자에 자극받아 조선청화백자에 대한 제작 욕구가 점차 심대해졌다.

이밖에도 명의 환관 또는 조선 신하가 바치거나 선물로 들여온 중국도자기에 대한 기록도 신록에 나타난다. 그러나 명은 선덕제가 승하한 1436년부터 성화제가 등극하는 1465년까지 내우외환으로 황실자기를 생산하는 경덕진의 운영이 순조롭지 않았다. 환관의 발호에 따른 정치적 불안은 경덕진의 휴업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자기무역도 전면 금지되었다.

첸쩡샤는 '중한고미술협회'이사로 1,000여점의 중국도자기를 두루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CC'는 중국도자기(Chinese ceramics)를 뜻한다.

채준 기자 doorian@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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