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는 1950년대다. 뉴욕 밤거리를 거닐던 한 남자는 이런 식의 말을 농담 삼아 일행에게 내뱉는다. “공산주자들이 겁도 없이 돌아다니네…” 영화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나 아마도 매카시즘 광풍이 미국 전역을 뒤덮었을 때로 여겨진다. 친구가 공산주의자여도 의심을 받고 스스로의 결백을 알리기 위해 지인을 고발해야 했던 광란의 시절, 과연 동성 사이의 사랑은 별 탈 없이 이뤄질 수 있을까.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고 사회 제도에 변화가 있다 해도 오래도록 뿌리내린 편견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21세기에도 남자와 남자의 사랑, 여자와 여자의 애정 관계는 질병이나 비정상으로 취급 받기 일쑤다. 하물며 공산주의자에 대한 마녀사냥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던 1950년대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더욱 단단했을 수밖에.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루니 마라)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손님 캐롤(케이트 블랜쳇)과 조우한다. 모피를 두르고 당당한 걸음새로 백화점을 거니는 캐롤을 보며 테레즈는 눈길을 돌리지 못한다. 캐롤은 테레즈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산 뒤 돌아간다. 테레즈는 캐롤이 가죽장갑을 (아마도 일부러) 두고 간 사실을 알고 소포와 함께 간단한 편지 한 장을 보내고 두 사람의 별다른 인연이 시작된다.
캐롤은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다. 아이가 있고 대저택이 있으며 무엇보다 삶의 여유를 지녔다. 성적인 이유로 이혼소송을 진행 중인데 바라는 것보다 누리는 것이 더 많아 보이는 여인이다. 반면 테레즈는 결핍투성이다.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싶은 욕망은 강하나 낡고 볼품 없는 카메라만 지니고 있다. 아침마다 줄을 서서 백화점으로 출근하는 그에게 “난 두렵지 않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캐롤은 선망과 열애의 대상이다.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은 캐롤의 자유분방함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이루고 싶은 테레즈의 열망이 만나면서 사랑이 빚어진다.
둘 사이의 사랑은 성별을 넘고 편견의 벽을 부수고 빈부로 규정된 계층을 뛰어넘는다. 갖은 장애를 극복하며 서로를 그리워하다 사랑에 이르는 과정은 애틋하고 애틋하다. 남녀 사이의 사랑을 다룬 멜로만이 진정한 멜로라는 편견을 지닌 관객이 아니라면 왼 가슴에 꽤 묵직한 통증을 느낄 만하다. 동성애자의 사랑이 이성애자의 마음까지 이토록 크게 울리기는 아마도 ‘브로크백 마운틴’(2005) 이후 처음 아닐까.
영화는 여러 악조건 속에서 사랑이 이뤄지는 모습을 비추며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가슴을 움직이는 영화이면서도 현실과는 거리가 먼 판타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성소수자인 토드 헤인스 감독은 ‘파 프롬 헤븐’(2002)에 이어 소수자의 사랑을 다룬다. 안락한 중산층 삶을 살던 중년여성이 남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방황하다 흑인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세묘한 ‘파 프롬 헤븐’은 비정으로 끝을 맺는다. ‘파 프롬 헤븐’이 현실의 동토를 확인한다면 ‘캐롤’은 비현실적인 행복의 나라에 안착하며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섬세한 심리 묘사와 스크린에 새겨지는 아름다운 빛의 조화는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미국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의 소설 ‘소금의 값’을 밑그림 삼은 영화다. ‘리플리’와 ‘열차 안의 낯선 자들’ 등 범죄소설로 이름이 높은 하이스미스는 1952년 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으로 이 소설을 냈다. 한창 지가를 높이던 서스펜스 작가에게 레즈비언 딱지가 붙을 것을 우려한 출판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책은 100만부가 팔리며 인기를 끌었으나 하이스미스는 집필 사실을 계속 숨기다가 1990년 ‘캐롤’이란 제목으로 재출간하며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2월 4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